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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자서전 Jan 27. 2021

뒤늦게 찾아온 기쁨

   50 중반의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나보다 2살이 많은 목사님이 계셨지만, 우리 기수에선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습니다.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대학동기생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상담대학원엘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 대학교에는 상담대학원이 없었습니다. 안양에 있는 대학원에서 상담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대학동기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담을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습니다. 

 “사회복지대학원에서도 상담을 가르쳐줘요. 나를 같이 사회복지 공부해요.”

라고 말하면서 사회복지대학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복지대학원엘 입학했습니다. 입학과 동시에 과대표를 맡았습니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각종 이벤트를 하였습니다. 반응도 좋았습니다. 학우들의 사랑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사회복지개론》을 강의하던 교수님이 사회복지협의회를 소개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아직 그런 협의회가 없다고 합니다. 강의가 끝난 후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에 사회복지협의회를 만들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몇몇 교수님 등의 지원을 받아 (가칭) 사회복지협의회 준비사무국장으로 사회복지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졸업 후에는 장애인과 함께 장애인 공동작업장을 만들었습니다. 물세탁을 전문으로 하는 작업장입니다. 사우나, 모델, 뷔페식당, 헬스클럽, 예식장 등에서 나오는 세탁물을 받아서 세탁한 후 납품했습니다. 작업장이 있는 곳 부근에 거주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동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힘들지만 보람이 있었습니다. 규모도 점차 커져갔습니다.  

  

  어느 날 사회복지대학원 동기생 중에 목사 사모님이 계셨다. 사모님이 목사님과 세탁공장을 찾아왔습니다. 

 “웬일이세요?”

 “장로님 뵙고 싶어 왔어요.”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용건은 자기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돌아가셨는데 며칠 후에 또 찾아왔습니다. 간곡하게 부탁을 하십니다. 생각해 보겠다 말씀드리니 돌아가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를 하시다가 퇴직 후 목회를 하십니다. 교사 시절에도 홀몸노인들을 돌보셨다고 합니다. 노인 무료급식소도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 외에 복지시설이 몇 군데 더 있습니다. 노숙자를 위한 시설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지자체로부터 장애인 세탁시설을 위탁받았는데 자기는 할 줄 모르니 와서 운영해달라는 것입니다.     

 

  고민했습니다. 내가 개척한 이곳은 본궤도(本軌道)에 올랐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에게 인계를 해주자.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향해 가자. 혼자 고생하시는 목사님을 도와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후임자를 찾아 인계를 해주었습니다. 

 세탁공장을 인계하고 한 달간 쉬었습니다. 공장을 하면서 쌓인 피로를 산과 들로 다니면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로 샤워했습니다. 

  그리고 복지시설에 출근했습니다. 애초 생각과 달리 나에게는 맞지 않은 직급이었습니다. 시설장, 사무국장이 있고 그 밑에서 일을 했습니다. 세탁공장은 있지만, 가동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수리해야 하는데, 수리를 할 수 있는 예산은 없습니다. 시에 예산을 신청했습니다. 어렵게 1억 원의 예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산집행이 안 됩니다. 왜 그런지 국장, 시장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야기인즉슨 이렇습니다.


  ‘지자체 장애인 협회에서 세탁공장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중단을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곳은 지하수가 충분히 안 나옵니다. 세탁공장에 지하수가 안 나오니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상수도 시설을 안 되어 있습니다. 상수도가 있어도 세탁공장에 상수도를 사용하면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습니다.’    

 

  이곳 복지시설의 정년은 만60세입니다. 1년 6개월을 근무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전에 이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목사님이 야속했습니다. 물어보지 않은 나도 불찰입니다.     


  그때 마침 지자체에서 ‘농촌형 재가 노인복지센터’ 공모가 있었습니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시에 제출했습니다. 많은 시설에서 응모했습니다. 되고 안 되고는 하늘에 맡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가 안 되면 나는 또 어떤 일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간절히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농촌형 재가 노인복지센터의 정년은 5년 후이다. 65세까지 할 수 있습니다.

  지자체에서 한 곳에만 주는 이 공모에 내가 써낸 사업계획서에 응답이 왔습니다. 행운입니다. 지역 주민들이 좋아했습니다. 농촌형 재가 노인복지센터는 ‘가정봉사원파견센터’라고도 불립니다. 홀로 사시는 노인들에게 찾아가 밑반찬 배달, 말벗, 세탁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노인복지사업입니다.  


 사업을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마땅한 장소를 찾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시에서 주는 금액은 5천5백만 원입니다. 그 돈은 건물을 임대하는 데만 써야 합니다. 다른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 사업이 시작되면 직원 급여와 사업비가 나옵니다. 

  지역을 다니며 사업장을 구하려고 해도 마땅한 곳이 안 보입니다. 한 달 동안 찾아다녔습니다. 몇몇 경로당을 찾아갔습니다. 경로당은 어르신들이 자체적으로 식사를 해 드십니다. 하지만 불편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어르신이 마땅한 장소가 있다고 가보자고 합니다. 빈 가게가 있다고 하면서 알려주셨습니다. 가서 보니 가게 안은 공실로 비어있는지 몇 달 되었다고 합니다.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니 예전에 식당을 한 곳인데, 거미줄도 보이고, 먼지도 쌓였습니다. 가게 주인을 만나니 자기는 월세로 놓지 전세는 안 놓는다고 합니다. 몇 번을 찾아가서 겨우 승낙을 받았다. 5천5백만 원에 전세로 계약을 했습니다. 건물은 1층과 2층을 쓸 수 있습니다. 건평은 50평입니다.                 

  내부 수리, 사무용품, 식당 집기, 식탁 모든 것을 사비로 하거나 협찬을 얻어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봉사원파견센터를 열었습니다. 1층은 무료급식소를 꾸몄고, 2층에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재가복지사업을 시작하고 3개월 후에 주 1회 무료급식을 했습니다. 매주 수요일에 어르신들이 오셨습니다. 점심을 맛있게 드십니다. 

  급식비는 자비로 시작했고, 나중에 후원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이 찾았습니다. 주 1회에서 2회로 늘렸습니다. 후원자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주 3회 무료급식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주 5일 무료급식을 했습니다. 1년이 넘도록 자비로 무료급식을 하니 시에서 급식비를 지원했습니다. 조리는 자원봉사자로 운영을 했습니다. 자원봉사자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그렇게 5년을 지냈습니다. 만65세로 정년이 되었다. 이런 시설을 개척하기가 어려운데 후임자를 결정하는 일에 목사님이 자기가 내정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시에서 사업을 받을 때 비영리법인에만 사업을 준다고 해서 목사님의 사단법인 명의로 사업을 받았습니다. 시설장의 임명은 법인에서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나는 떠났습니다.

   

 은퇴 후에 우울증이 왔습니다. 딸이 가까이에 이사를 와서 우울증을 해소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딸이 서울로 가자고 해서 서울로 가서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6년이 흘렀는데, 어느 날 복지센터에서 봉사하시던 개척교회 김 목사님이 전화했습니다.
  “장로님! 복지센터가 문을 닫았어요.” 

왜 그랬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후임자가 재정을 잘못 운영하여, 지자체로부터 운영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잘 되기를 바랐는데 문을 닫았답니다. 문을 닫은 것도 미덥지 않은데, 후임자는 내가 지자체에 고발해서 그만두게 되었다고 헛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하는 말까지 들립니다. 미안한 마음에 그랬겠지만,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장애인 세탁공장을 계속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탁공장을 인수한 분은 집도 없어서 우리 집에서 그냥 살라고 했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돈을 벌어서 땅을 사서, 집도 짓고, 세탁공장도 지었습니다. 지금은 장애인 작업장이 아닙니다. 사업체가 되었습니다. 한 달 순 수입이 약 천오백 만원이 됩니다. 수익은 내가 운영할 때의 3배가 되었습니다. 평택에는 세탁공장이 딱 두 곳입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봅니다. 좋은 의도로 남을 도와준다고 한 내가 바보 같습니다.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   

 

  그 목사님 내외가 찾아와서 나를 칭찬하였습니다. 칭찬을 받은 나는 기분이 좋았겠죠. 이렇게 저렇게 나를 기분 좋게 해주었습니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같습니다.     

 이솝우화에 ‘개구리와 황소’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마 개구리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 개구리들이 황소를 보고 집으로 왔습니다. 
 

 “엄마! 저기 황소를 봤는데, 엄청 커요.”

 엄마 개구리는 배를 부풀렸습니다. 

 “이렇게 크니?”

 “아니요 더 커요.”

 엄마 개구리는 배를 더 크게 부풀리다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개구리와 황소라는 이솝우화가 생각납니다. 나의 행동이 엄마 개구리를 닳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나를 알지 못하고, 살았던 게 후회됩니다. 

  하지만 뒤늦게 상담을 공부하면서 나를 알아가면서 찾아오는 기쁨이 생겼습니다.

 이런 기쁨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참 기쁨입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자라고 자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교육은 넓은 의미의 체험이다. 그리고 정신적 사고를 뜻한다. 여러 가지를 체험하고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교육이 계속되는 동안 인간은 꾸준히 자아를 찾아 성장하는 것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 새로운 사색을 못 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갈 능력을 잃는다.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69쪽) (김영사, 2018) 


  이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물질보다는 사색을, 그리고 배움을, 

  살아있는 날까지 배운다. 교육이 그치고, 체험이 멎으면 심장도 멎습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많은 물질을 가진 자는 부유하지만,

  자신이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도(道)와 하나가 된 사람이다.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오래가고,

  죽어도 잊히지 않는 자가 오래 사는 것이다."

   - 《12가지 인생의 법칙》 (502p) (조던 B. 피터슨, 강주현 옮김, 메이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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