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관계
사람은 관계에서 살아간다. 관계가 가족을 만들고, 사회를 만든다. 관계는 이물질이 없는 순수하여야 오래간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부모자식관계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가장 귀중한 관계이다. 부부관계 속에 부모자식의 관계가 맺어진다. 이를 우리는 가족이라고 하고 가족이 모여사는 공동체를 가정이라고 한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선 또 다른 계약관계가 존재한다. 그것을 크게 보면 사회관계라고 말한다. 사회관계 안에는 계약관계가 존재한다. 회사에 들어가면 근로계약서를 쓴다. 사용주와 고용자의 관계는 계약을 하고 일을 한다. 이 계약은 서로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 상호간에 이익이 깨지면 관계는 무너진다. 깨끗하고 순수해야 할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때론 아스팔트길을 가기도하고, 흙탕물, 진흙길도 가야 가정을 지킬 수 있다.
사회관계에 또 다른 축은 이웃관계이다. 여기는 학교, 종교(교우), 마을과 같이 여러 종류의 관계에 알게 모르게 얽히고 설혀 살고 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눈다.
사회관계에는 사회정의가 명확할 때 관계의 정립이 될 수 있다. 괘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 정의를 분별해주는 기준은 인간의 사회관계에 이득을 주는 것이다. 단순히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정의가 아니다. 또한 개별적 행동은 과거에는 정의롭다가 나중에 정의롭지 않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과거에 사회적 이득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정의롭다. <쾌락>(문학과 지성사)23쪽
사회관계에 이득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기사들은 사회관계를 무너뜨리는 기사가 너무 많이 나온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가 나오고, 재벌들의 도덕적 해이가 만든 부실기업을 노동자들이 떠안게 만들고 있고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부어야 할 지경이다. 배운사람, 가진 사람,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하철요금을 안 내고 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단다.
왜 이렇게 사회적 관계가 무너지고 있을까? 윗물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래라도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잘못되어도 나에게 이익이 되면 불의로 가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가 무너지는 이유로 심리학자들은 애착관계를 말한다.
‘갓난아이 떼 관계를 맺을 기회를 잃으면, 신경성 거울 장치의 발달은 물론 기능마저 해를 입게 된다. 그러면 결국 자존심이 온전하게 형성되지 않을뿐더러 관계를 맺고 능력을 습득하는 데도 결함이 생긴다.’ <공감의 심리학>(127쪽) (요아힘 바우어 지음, 이미옥 옮김, 에코라브르 출판)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타협을 아는 것은 장기적으로 아이의 성공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는 학업 성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아이가 성장해 갈수록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이러한 생존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
<엄마가 모르는 아이의 발달 단계> 146쪽 (린다 블래어, 김세영 역, 푸른육아)
어려서부터 애착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먹고 살기 위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들과 애착형성에 몰입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악순환이 계속되어선 안 된다. 후대아이들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선, TV보다는 독서와 토론을, 나무라기보다는 칭찬을, 가까이보기보다는 멀리보고, 밖으로 돌기보다는 안으로 돌고, 외식보다는 온 가족이 함께 만드는 요리가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