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 2.>
카튜사의 양육환경
<부활 1, 2.>(레프 톨스토이 저, 박형규 역, 민음사, 2013)
일정한 남편이 없는 여자는 해마다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어느 마을에서도 으레 그렇듯이 필요 없는 자식은 일에 방해만 될 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세례만 받게 하고 그 뒤 젖을 주지 않아 굶어 죽고 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섯 아이가 죽었다. 다섯 아이 모두 세례를 받았으나 통 젖을 먹지 못해 죽고 말았다. 15
톨스토이는 앞 부분을 이렇게 시작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은 이 문장을 통해 알 수 있고,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마슬로바는 하녀의 딸이다. 당시 하녀들은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다. 다행이 여지주의 사랑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래서 구원받은 뜻의 ‘스파숀나‘라고 불렀다.
언니는 비칭(卑稱)인 ‘카티까또‘, 동생은 애칭(愛稱)인 카테니카로 불렀다. 두 이름의 합성어가 ‘카튜사‘이다. 동생은 작가로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했고, 언니는 일 잘하는 여종으로 키우려 했다. 이런 양육자의 이중적인 양육방법은 마슬로바의 정서에 좇지 못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부모의 양육방식이 아이의 성장을 좌우한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부모가 만들어내는 작은 변화는 아이의 성장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351쪽, <3~7세 아이를 위한 사회성발달보고서>( 앤 데스모어, 마거릿 바우만, 지식채널, 2012)
엄마의 양육이 필요한 시기에 여지주 두 사람의 마슬로바에게 대하는 양육태도는 카튜사의 정체성에 혼돈을 준다. 한 가지 일에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사이에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혼란이 온다. 부정과 긍정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가 공부를 하게 하느냐?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느냐? 두 차이에서 부모들이 갈등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훌륭하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키워야한다는 마음은 같다. 마슬로바의 양육자는 최종목표가 달랐다.
"협업에 기초한 자녀의 공동양육은 어린 자녀에게 더 높은 관찰력과 함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개발시켜준다." 52쪽 <공감의 힘> (데이비드 호우, 이진경 옮김, 지식의 숲, 2013)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데 부모의 화합이 자녀의 성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마슬로바는 양육자의 이중적인 태도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다. 이런 자녀들은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눈치를 보는 아이로 성장하게 될 수 있다. 즉 지나치게 눈치를 보거나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소신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정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유아는 새로운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양육자를 바라본다."
<정서심리학>(James W. Kalat, Michelle N, Shiota, 민경환 외 3인 옮김, 시그마프레스, 2011)
아이들은 양육자를 바라보고 양육자의 태도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카튜사는 사회에 나와서도 다른 사람들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사회적 환경도 일관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녀에게 유아기 때부터 사회생활을 통해 붙여진 이름까지 9가지가 된다.
카투사의 이름
1. 스파숀냐, (유아기 때)
2. 카티카또 : 비칭(卑稱) 여지주 언니마이야 이바노프나가 부른 이름,
3. 카테니카 : 애칭(愛稱) 여지주 동생소피야 이바노브나가 부른 이름,
4. 카튜사 : 카티카또와 카테니카란 이름을 합성한 이름
5.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 마슬로바 (본명)(27세) 66
6. 류보피(재판에서 대답한 이름 59)
7. 카테리나 (세례명은 무엇이요하고 재판장이 물을 때 60)
8. 류브카(매춘부로 일할 때 이름) 64
9. 마슬렌니코프 342
자신이 타인들에 의해 삶을 살아왔고 주체적인 행동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당시의 하녀들은 주인의 종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야 했었다. 그러나 여지주 중 동생인 소피야 이바노브나의 사랑으로 마슬로바는 정서적 눈을 뜰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서의 눈이 채 뜨기도 전에 언니 마이야 이바노프나에게 상처받는 말을 듣고, 정서의 문을 닫고 세상을 보며 자란다.
이런 양육이 결국 마슬로바를 깊은 수렁에 빠져 비참함 속에서 살게 된다. 자기 혼란이고, 자자기 모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마슬로바로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있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두려운 마음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하녀가 아니라 생각이 있고, 정서적으로 무지한 사람이 아닌 것 자체가 그녀를 힘들게 만든다.
‘자신의 인생관이 변하는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은 존재 가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자기 가치를 존속시키기 위해 자기와 똑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를 본능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네홀퓨도프가 다른 사회로 그녀를 끌어들이려 하는 것을 눈치 채고, 자기가 그의 뜻대로 여기에서 벗어나 그가 끌어들이려던 세계로 발을 내디딘다면 자기에게 긍지와 자존심을 갖게 해줬던 자기 인생의 의의가 없어질 것만 같아 그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었다.’ 268쪽
자녀의 양육은 부모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이 함께해야 한다. 한 아이가 자라기 위해선 온 동네가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환경이 될 때 아이는 성숙한 사회인이 될 수 있다.
마슬로바는 오직 지시에 의해서 양육되었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이 곧 대인관계능력의 핵심이며, 이러한 능력을 키워야 사회적 연결성을 내면화하게 되어 강한 회복탄력성을 지니게 된다."
<회복탄력성>(김주환, 위즈덤하우스, 2010)
그녀의 불행은 양육환경의 이중적 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없는 하녀의 딸로 자라면서 두 여지주의 상이한 양육방법에서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부활을 읽고 단순히 독후감을 쓰려고 하다가 왜 마슬로바가 불행해져야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튜사가 불쌍해졌고, 측은해졌다. 이 시대에도, 앞으로도 또 다른 카츄사들이 나오지지 말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정에서 부모의 일관되고 협력적인 양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한 가지 자녀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다 것도 느꼈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인들을 농부로 고용한 강대국이었다. 그런 러시아가 강대국지위를 독일에게 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 책에서 실마리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