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차라리 피독망상이 있는 경우라면 설득이 가능하지만, 영혜의 경우는 이유가 불분명하고 약도 효과가 없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속 이 문장은, 정신의학적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해의 고통을 보여준다.
망상이란 무엇인가?
흔히 망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비합리적 믿음이라고 정의된다. 조현병 환자의 피해망상, 독살당할 것이라 믿는 피독망상, 혹은 신체가 변했다고 확신하는 신체망상이 그렇다. 망상은 설득이 어려울 정도로 견고하며, 현실 검증력을 잃은 믿음이 자기 완결적 체계를 만들어내는 상태다.
그러나 망상이 언제나 병리적이기만 한가? 문학과 에세이, 사유의 언어 속에서 망상은 또 다른 의미의 빛을 갖는다. 망상은 심리의학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문학에서는 ‘현실의 틀을 넘어서는 욕망’이나 ‘극단적 의지’를 은유하는 표현으로도 쓰인다.
정희진은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30대에 지향한 책 읽기 방법은 책을 빨리, 정확히, 복잡하게, 쉽게 읽는 것이었다. 망상에 가까운 욕심이지만, 이는 요리와 비슷하다. (…) 책 읽기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다.”
여기서 ‘망상’은 정신병리적 망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망상은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이상’, ‘끝없이 높은 욕망’, ‘과도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지향’을 비유하는 문학적 표현이다. 이런 망상은 병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불가능할지 모르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창조적 욕망이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읽어내려는 태도다.
의학적 망상과 문학적 망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의학적 망상은 사람을 현실에서 고립시키지만, 문학적 망상은 오히려 현실을 더 넓게 펼친다.
의학적 망상은 세계를 지나치게 단단하게 재구성해 타인의 목소리를 차단하지만, 문학적 망상은 세계의 틈을 넓혀 새로운 시야를 허락한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만은 아니다.
두 종류의 망상은 모두, 인간이 기존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려 할 때 나타난다. 영혜의 거식은 의사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고통의 표현이며, 정희진이 말한 ‘망상에 가까운 욕심’은 그가 세계와 관계 맺는 지적 태도를 드러내는 은유다. 둘 다 인간 내면의 언어화되지 않은 층위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망상은 때로 인간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고, 때로는 더 나은 세계를 꿈꾸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력이다. 의학적 망상은 고통의 구조를 드러내고, 문학적 망상은 욕망의 구조를 드러낸다. 우리는 둘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떼어놓고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늘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설명할 수 없는 욕망 사이를 오간다. 망상은 그 경계에서 발생하는 언어다. 그 언어는 때때로 병리로, 때때로 창조로, 때때로 문학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망상은 두 세계를 잇는 다리다. 한쪽에서는 인간을 아프게 하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을 확장하며, 우리는 그 다리 위에서 현실과 상상, 고통과 희망 사이를 조심스럽게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