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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파도 위에서

행동으로 길을 내어 온 나의 이야기

by 마음 자서전


나는 오래전부터 우울과 함께 살아왔다.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우울은 이미 조용한 그림자처럼 내 삶을 따라다녔다. 심리상담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냥 기분이 가라앉는 날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우울을 모르고 느껴왔다.’.

항우울제를 4년 넘게 먹으며 배운 것은 우울은 하루에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심한 날이 있으면, 또 조금은 나아지는 날도 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워야 했다.


많은 책이 도움을 주었지만 가장 내게 확실히 가르쳐준 것은 책 바깥, 내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었다. 우울함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면 나는 일부러 밖으로 나간다.

멀리 있는 도서관에 가고, 영화관에 가고, 몸이 가볍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집에서 음악을 듣는다. 케더헌의 잔잔한 음부터 ABBA의 흥겨운 리듬까지, 그 소리는 어느 순간 내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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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창우의 <떠나렴>이란 시는 나의 이야기 같다.


“떠나렴

우울한 날엔 어디론가 떠나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렴.”


나는 생각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떠나왔구나, 어디든, 아주 작은 곳이라도.

그런데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되었다. ‘떠남’만으로는 우울을 완전히 다룰 수 없다는 것을. 기분이 변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때 만난 것이 행동활성화치료(BA, Behavioral Activation)였다. BA는 우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명확하고도 단순한 원칙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원칙은, 놀랍게도, 내가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던 일과 닮아 있었다.


BA의 10가지 핵심 원칙

원칙 1: 사람들의 기분을 변화시키는 열쇠는 그들의 행동이 달라지도록 돕는 데 있다.

우울을 느낄 때 억지로라도 걸음을 옮겼던 것은 결국 이 원칙을 삶에서 스스로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우울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일어난 변화와 그에 대한 적응 방식이 나를 서서히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이기도 했다.


원칙 2: 우울증은 삶의 변화와 관련이 있고, 이에 대한 단기적 적응법들이 의도치 않게 우울증을 지속시킬 수 있다.

나는 힘들면 방에 머물렀고, 힘들면 일을 미뤘고, 힘들면 사람을 피했다. 그 작은 회피가 쌓여 우울을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행동활성화는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어떤 행동이 항우울 효과를 주는지는

당신의 삶 속 ABC(선행-행동-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고.


원칙 3: 어떤 활동이 도움이 되는지는 ABC에서 단서를 찾는다.

우울함이 오는 아침, ‘밖으로 나가는 행동’이 가져오는 작은 안정감이 있었고 ‘음악을 듣는 행동’이 주는 가벼운 따뜻함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 ABC였다.

또한 행동활성화는 “기분이 좋아지면 하겠다”가 아니라 기분과 상관없이 계획된 활동을 구현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원칙 4: 기분이 아닌 계획에 근거하여 활동을 구조화하라

나는 행동이 감정을 끌고 간다는 것을 수없이 반복되는 ‘작은 성공 경험’ 속에서 깨달았다.


원칙 5: 작은 일부터 시작할 때 변화는 쉽게 일어난다.

우울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걷기 5분, 음악 10분, 외출 30분— 이런 작은 행동은 거대한 우울을 조금씩 흔들어놓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보상이 주어지는 활동을 찾는 것이다.

원칙 6: 자연히 강화될 수 있는 활동을 강조하라.

나는 책을 읽는 일, 음악 듣는 일, 영화를 보는 일, 도서관을 걷는 일이 나를 자연스럽게 ‘조금 더 살고 싶게 만드는 활동’임을 알았다. 행동활성화에서 치료자는 비판자가 아니라 조력자, 코치가 된다.


원칙 7: 자애로운 코치가 되어라

나는 이 원칙을 내 삶에도 적용했다. 나를 탓하는 대신, 나를 격려하는 내부의 목소리를 키웠다.

또 BA는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어떤 결과든 ‘유용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원칙 8: 경험적 접근을 강조하고, 모든 결과가 유용함을 인지하라.

잘 안되는 날도 괜찮았다. 그날의 실패가 내 행동 실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활성화치료는 이 모든 과정의 기반이 되는 태도를 강조한다.


원칙 9: 경청하고, 이해하며, 행동지향적 접근을 고수하라.

나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 작은 욕구, 작은 계획을 더 주의 깊게 경청하는 법을 배웠다.

변화는 장애물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원칙 10: 활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해결하라.

우울로 인해 몸이 무거워질 때, 나는 그것을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해결해야 할 ‘장애물’로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움직임이 훨씬 쉬워졌다.


우울과 함께 앞으로 걸어가는 일

나는 여전히 우울하다.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다루는 법을 잘 안다.

우울은 나에게 멈추라고 말하지만, 나는 작은 행동으로 나답게 응답한다.


차를 마시며

책을 집어 들고,

음악을 한 곡 듣고,


어느 날은

먼 도서관엘 가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때로는 아주 낯선 곳으로 떠난다.


이는 우울을 이기는 법이면서

동시에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이다.


행동은 기분을 끌고 오고, 작은 선택이 큰 변화를 만들며,

나는 오늘도 그렇게 우울의 파도 위에서 내 길을 한 걸음씩 내고 있다.


참고

Christopher R. Martell • Sona Dimidjian • Ruth Herman-Dunn 공저, 《우울증의 행동활성화치료》, 김병수 외 2인 공역, 학지사, 2024,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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