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밀어낼수록 더 가까워지는 것들
나는 ‘백곰실험’을 처음 알게 된 것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읽을 때였다. 책 속의 한 문장은 내 마음을 오래 떠나지 않았다.
“심리학 실험 중에 ‘백곰실험’이라는 게 있다. 실험군을 둘로 나눈 후 똑같이 백곰이 등장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단, 한 실험군에게는 이후 백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다른 실험군에는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는다. 실험 결과, 백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 집단은 어디일까?
결과는 백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을 지시받은 실험군이 백곰에 대해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자꾸 생각나고, 잊어버리려 할수록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겠다는, 잊어버리고 말겠다는 노력 자체가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책장을 덮고도 한참 동안 그 부분을 떠올렸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이런 백곰이 있기 마련이다. 잊고 싶은 기억, 떠올리면 불쾌한 얼굴, 되새기기 싫은 말.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할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더 크게 발톱을 드러내는 무언가들 말이다.
그 후 나는 《백곰심리학》을 읽으며 이 심리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곰실험‘이라고 부르는 인지 연구 및 기억연구가 최근 몇 년간 활발히 이루어졌다.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강요하면 오히려 ‘백곰’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즉 무언가를 잘하려고 지나치게 애를 쓰면 반대로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마치 청개구리와 같은 이런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심적 통제의 역설 과정 Ironic processes of mental control’이라고 부른다. 신중하게 처리한 일이 오히려 고뇌를 더 깊게 하는 셈이다. 무리해서 억지로 금욕적인 심리 트레이닝이나 자기 계발 등의 단련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것이 점차 상식이 되고 있다.”
그 구절을 읽으며 나는 내 삶의 어느 순간들이 떠올랐다. 억지로 잊으려 한 기억, 피할수록 더 날카로워진 감정들. 그때 나는 애써 도망치느라 더 깊숙이 그 감정 속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일본 심리학자 우에키 리에植木 理惠는 마음의 상처를 다루는 법을 이렇게 말한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첫걸음은 스스로 그 상처를 깨닫는 일이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상처를 기억 한구석에서 억누르지 않고 자각하는 일이 마음으로 백곰을 몰아내는 출발점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마음이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잊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찬찬히 상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때론 실컷 상처에 소금을 쭉 뿌려보자.”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는 표현은 처음엔 거칠게 느껴졌지만, 곱씹어보니 이것은 고통과 마주한다는 뜻이었다. 고통에서 도망치지 않고 제자리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백곰을 쫓아내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다.
마음에 붙잡힌 백곰과 화해하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마음속 백곰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앉혀두는’ 일이 때로 더 편안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 네가 또 왔구나. 오늘 하루는 옆자리에 앉아 있어도 좋다.”
이렇게 말해 보면, 이상하게도 백곰은 예전처럼 격렬하게 나를 흔들지 않는다.
마음이란 억누를수록 요동치고, 허용할수록 잔잔해지는 묘한 바다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백곰을 품고 살아간다. 어떤 백곰은 상처의 기억이고, 어떤 백곰은 후회나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 백곰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성장의 방향을 가리키는 길잡이일지도 모른다.
억지로 잊으려 하기보다, 천천히 바라보고 이름 붙이고 이해할 때
백곰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니라 ‘기억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게 내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