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SD와 발달 트라우마를 알게 되기까지
나는 오래전부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과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왜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지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내 삶에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이어진 발달 트라우마 장애(DTD)가 있었다는 사실을.
1. 트럭 아래 깔려 있던 어린아이
1·4 후퇴 때, 외할아버지 트럭을 타고 친척들과 피난을 가던 중 눈길에 차량이 전복되었다. 깨어나 보니 내 위로 트럭이 덮여 있었다. 나는 논두렁 틈 속에서 울부짖으며 “엄마!”를 불렀다. 그 순간의 공포는 지금도 또렷하다. 나는 죽음이라는 개념도 모르던 아이였지만, 몸은 이미 생존의 공포를 기억해 버렸다.
2. 백병원에서의 긴 겨울, 그리고 잃어버린 학업의 즐거움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의 교통사고는 내게 또 다른 충격을 남겼다. 입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사고 이후 나는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지금에서야 안다. PTSD에서는 사건 이후 이전처럼 집중이 안 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다쳤던 것이 아니라, 마음이 멈춰버렸다.
3.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기억
어린 시절 신설동 개천에서 헤엄을 치다가 머리를 다친 후, 아빠는 동네 형과 정릉 수영장에 가라고 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던 나는 튜브에 의지해 놀았다. 한 아저씨가 내 쪽으로 다이빙하듯이 뛰어들었다. 튜브가 뒤집히고 나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숨이 막히는 공포, 손에 잡히지 않는 물살, 버티려 해도 버틸 수 없는 무력감. 그 경험 이후 평생 물을 두려워하게 된 것도,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었다. 익사 위협은 가장 강력한 외상 경험 중 하나였다.
엄마는 물가에 가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수영을 할 줄 모른다.
4. 군대에서의 빠다, 반복된 공포
군대에서는 빠다—즉 구타—가 일상이었다. 저녁이 되면 졸병들은 숨을 죽였다. 어떤 날은 몽둥이가 엉덩이에 떨어졌고, 이미 멍든 곳을 다시 맞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뿐 아니라 동료도 맞다가 허리를 다쳤다. 도망갈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폐쇄된 폭력 환경 속에서 나는 매일 생존을 고민하는 청년이 되었다.
5. PTSD와 발달 트라우마—나는 두 가지를 모두 겪어왔다
그동안 나는 내가 겪은 사건들을 ‘운 나쁜 사고들’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책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에서는 트라우마의 두 가지 층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PTSD는 특정한 외상성 사건에서 비롯되는 반응이고, 발달 트라우마(DTD)는 한두 사건이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반복적 외상으로 뇌의 구조와 기능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상태이다. 또한 PTSD는 사건과 관련된 자극이 있을 때 반응하지만, DTD는 특별한 자극이 없어도 만성적인 불안과 공허함을 남길 수 있다. (최성애·조벽, 2018, p.139)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내가 겪은 사건들은 어느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단일 외상’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이어진 반복적 생존 위협이 내 마음의 기초 구조를 흔들어 놓은 발달 트라우마였다.
6. 특정 사건만 떠올릴 때 반응하는 PTSD, 이유 없이 가라앉는 불안의 DTD
PTSD는 특정 사건—트럭 전복, 교통사고, 물에 빠졌던 순간, 군대 구타—이 떠오르거나 관련된 자극이 있을 때 반응한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설명하기 어려운 우울, 아무 일도 없어도 찾아오는 불안, 남들의 시선에 민감한 마음, 삶이 늘 무겁고 허전했던 감정은 PTSD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 감정들은 DTD의 전형적인 후유증이었다. 자극이 없는 데도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고, 마음속이 늘 텅 빈 느낌. 어떤 때는 이유도 모르고 기운이 가라앉는 날들.
나는 그것이 누적 외상이 만든 만성적 정서 패턴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이해한다.
7. 이제야 나는 나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위험과 공포를 겪었고, 그 경험들이 내 정서 발달과 자존감, 관계 방식에 영향을 준 것이다.
외상은 나를 부러뜨리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두려움이라는 뼈를 하나 더 심어놓았다.
하지만 이제 그 두려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PTSD, 그리고 발달 트라우마.
이제야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고,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라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삶은 상처로 점철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음과 버팀의 역사였다. DTD와 PTSD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가장 따뜻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