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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다는 위로와
마음의 상처가 남긴 그림자

신경성 폭식증과 정서적 먹기의 갈림길에서

by 마음 자서전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 어떤 아이에게 세상의 기쁨은 늘 따뜻한 냄새를 품고 찾아왔다. 양육자는 감정을 말로 건네는 데 서툴렀다. 그러니 사랑과 축하의 말 대신, 맛있는 음식이 그의 앞에 놓였다.

“잘했다.”

그 말 대신 달콤한 한 입이 전해졌고,

“참 기쁘구나.”

그 말 대신 따뜻한 국물 한 숟갈이 건네졌다.


그때 아이는 알지 못했다. 감정과 음식이 서로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 작은 관습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 남아 나중의 삶을 이끌어갈 하나의 감정 지형도가 될 것임을.

성인이 된 그는 좋은 일이 없어도 자연스레 음식을 떠올렸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피곤함이든 모든 감정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들었다. 그 향기로운 위로의 방식은 이제는 그를 부드럽게 감싸기보다 점점 무겁게 짓눌렀다.

음식이 감정을 대신하는 삶. 먹고 후회하고 또다시 먹는 삶. 그 반복 속에서 그는 비만이 되었고, 비만은 다시 죄책감을 낳았으며, 그 죄책감은 또다시 먹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여전히 정서적 먹기(Emotional Eating)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대신 음식에 기대는 오래된 패턴. 그 뿌리는 어린 시절의 애착과 정서 표기의 방식에 있었고,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도, 체중을 억제하려는 절박함도 없었다.

그저 감정의 방향이 음식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경성 폭식증은 그보다 깊고, 더 아픈 그림자다 신경성 폭식증(Bulimia Nervosa)은 단순히 감정을 달래기 위해 음식에 손을 뻗는 것과는 다르다.

그곳에는 폭식의 뒤를 잇는 심한 죄책감과 광적인 공포가 동반된다.

음식을 많이 먹는 순간, 사람은 마치 자신을 잃어버린 듯한 감각에 빠진다. 그러고는 즉시 그것을 없애고자 구토하거나, 변비약을 남용하거나, 필사적으로 운동하며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강박적 명령에 사로잡힌다.


정서적 먹기가 감정의 빈자리를 음식으로 채우는 행위라면, 신경성 폭식증은 음식을 ‘감정의 적’이자 ‘자기혐오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병이다.

정서적 먹기는 위안을 찾는 행동이지만, 신경성 폭식증은 위안과 미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순간 폭식은 달콤한 도피처가 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달콤함은 죄책감과 공포로 바뀐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혐오가 몰려오고, 그 감정을 지우기 위해 몸을 다그치고, 토해내고, 처벌하듯이 재촉한다.

정서적 먹기가 ‘감정의 대체 언어’라면, 신경성 폭식증은 ‘자기 처벌과 통제의 싸움’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를 갉아먹는 비극적인 순환이다.


정서적 먹기든 신경성 폭식증이든 공통적으로 남기는 상처가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자신을 돌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내면의 감정은 늘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음식으로 막아내며, 막아낸 후에는 죄책감과 무력감이 몰려온다.

이 사람에게는 타인의 감정을 받아줄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자녀의 작은 요청도 배우자의 사소한 표정 변화도 그에게는 감당해야 할 또 다른 파도가 된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과 위안과 싸움의 소용돌이가 너무 커 가족을 향한 다리를 건널 여유가 없을 뿐이다.

그러나 회복은 가능하다. 감정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회복의 시작은 어린 시절 배운 감정의 언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감정은 말로도 표현될 수 있고, 포옹으로도, 눈빛으로도, 천천히 걷는 시간, 차 한 잔, 누군가에게 건네는 고백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음식만이 위안의 언어였던 마음에 새로운 언어들을 하나씩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회복이다.

그리고 감정이 스스로 흐를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그제야 그는 가족에게 고개를 들어 다시 마음을 내어줄 수 있다.

정서적 먹기와 신경성 폭식증이 남긴 상처는 깊지만, 그 상처 위로 새로운 정서의 언어가 자라날 때,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할 힘도 조용히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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