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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의 눈으로 본 현대인의 성욕

성욕의 변화와 변태성욕

by 마음 자서전

나이가 들면 욕망이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형태를 바꾸고, 속도를 늦추고, 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젊은 날의 욕망이 몸의 소리였다면, 늙어서는 마음의 기척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요즘 사람들의 성욕을 볼 때, 쉽게 고개를 젓지 못한다.

뉴스를 보면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성욕을 해결하려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말한다. “요즘 세상은 너무 변태적이다.” 그러나 정말 변한 것은 성욕일까. 아니면 욕망이 머물러 쉴 관계의 자리일까.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성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섹스, 곧 생식기의 흥분과 삽입, 때로는 오르가슴으로 환원되는 행위는 프로이트가 말한 성의 일부에 불과하다. 존 먼더 로스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섹스’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섹스(생식기의 흥분과 삽입, 때로는 오르가슴이 따르는)보다 좀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건 성욕이고, 리비도고, 에로스라는 성과 관련된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건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존 먼더 로스, 《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가》, 류지호 옮김, 문학사상사, 2000, p.169)


이 말을 늙은 눈으로 다시 읽어보면, 성은 더 이상 쾌락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게 하는 힘, 누군가에게 다가가게 하고, 의미를 붙잡게 하며,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드는 에너지다. 젊은 시절에는 이 힘이 몸을 통해 소리쳤다면, 나이가 들수록 그것은 관계와 의미를 향해 조용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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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성욕이 여러 형태의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하던 에너지가 갈 곳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관계로, 공동의 삶으로 흘러가야 할 힘이 막히면, 욕망은 다른 출구를 찾는다. 때로는 성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과도한 자극과 반복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현대의 성적 혼란을 단순한 타락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성의 위기가 아니라 삶의 에너지가 머물 자리를 잃은 시대의 징후에 가깝다. 욕망이 문제인 적은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욕망을 함께 견뎌줄 관계가 사라졌을 때였다.

늙은이의 눈으로 보니 이제야 분명해진다.

리비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 끝날 때까지 형태를 바꾸며 남아 있는 생의 온기다.

문제는 그 온기를 어떻게 품을 것인가이지,

그 온기를 부정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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