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사람

연극성성격장애

by 마음 자서전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한 여직원이 떠오른다.

그녀는 언제나 눈에 띄었다. 말투는 생기가 넘쳤고,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목소리도 컸고, 감정 표현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외모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옷은 화려했고, 화장은 늘 또렷했다. 외모에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쓰고 다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인정받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민감했고, 칭찬에는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반대로 반응이 미지근하면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리려는 듯 보였다. 직장은 일하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하나의 무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 이야기를 꺼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얼마나 잘나가는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이 뒤따랐다. 그 이야기는 대개 반복되었고, 듣는 사람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씩 덧붙여졌다. 마치 그들의 성공과 인정을 자신의 삶 가까이에 두고 있음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느껴진 것은, 그 지인들이 실제로 얼마나 대단한가보다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나’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직접 자랑하기보다, 잘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 속에 자신을 겹쳐 놓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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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이혼을 했고, 그 이후에도 종종

“그 남자가 나를 만나자고 한다”

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실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여전히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아직 선택받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돌이켜보면, 그 말들과 지인 이야기들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를 증명해 줄 이야기들은 아직 남아 있다.”


연극성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계는 종종 현실보다 서사에 가깝다. 관계가 끝나도,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대에서 내려오기 위한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다음 장면을 이어가기 위한 장치가 된다. 그를 향한 주목이 사라지면 존재감도 함께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은근히 피곤하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함께 있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소모된다. 이유 없이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사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은데도, 이미 관여한 느낌이 든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탓한다.


“내가 예민한 걸까?”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예민함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삶이 늘 ‘보여지는 방식’으로만 유지될 때, 그 주변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관객이 된다. 박수를 치지 않아도 무대는 계속되고, 관객은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를 ‘연극성 성격장애’라고 부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가야 했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조용히 있어서는 충분히 사랑받을 수 없었던 시간을 오래 살아왔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보다, 돋보이는 모습으로만 존재를 확인받아 왔을지도 모른다.


연극은 즐거움을 주지만, 배우에게는 쉼이 없다.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삶은 화려해 보여도 고단하다.

그 경험은 나에게 한 가지를 남겼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과, 거리를 지키는 지혜는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무대가 계속될 때, 나는 반드시 관객이 될 필요는 없다. 이해는 하되, 참여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관계는 훨씬 덜 아프다.

당시에는 그 직원이 ‘연극성 성향’인 줄 몰랐다. 지금에서 돌이켜보니 그렇다.


덧붙이는 한 줄

‘잘나가는 지인 이야기’는 연극성 성향에서 자주 보이는 간접적 자기 과시(vicarious self- enhancement)에 해당한다. 자기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관계의 후광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