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라의 문장, 세잔의 사과

감정의 응고: 세잔의 물감병에 담긴 고독

by 마음 자서전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은 우정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는 결국 사람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통해 감정을 풀어내고, 어떤 사람은 끝내 말하지 못한 채 다른 방식으로 삶을 견뎌냅니다.

에밀 졸라는 말을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감정을 말할 수 있었고, 부당하다고 느끼면 항의했고, 분노하면 분노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삶에서 겪은 사건들은 그의 안에서 곧 문장이 되었고, 문장은 다시 사회로 나아갔습니다.


반면 폴 세잔은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늘 푸짐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 식탁 위에는 언제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시선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은행을 운영하던 사업가로 권위적이었습니다. 세잔의 편지를 뜯어보고 진로를 통제하며 아들의 삶을 관리하려 했습니다.

그 환경 속에서 세잔은 감정을 말로 꺼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정서적으로는 흙수저에 가까운 삶이었습니다.


학생 시절, 세 친구(졸라, 세잔, 바유)는 이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처음 상대는 누구와 하게 될까요? 창녀, 처녀, 과부?”


그때는 웃고 넘길 수 있는 농담이었지만, 이 말은 묘하게도 두 사람의 인생을 예고하는 말처럼 남습니다. 훗날 졸라는 실제로 창녀와의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을 소설 《나나》로 씁니다. 그에게 경험은 부끄러운 비밀이 아니라, 관찰되고 분석되어 언어로 정리될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졸라는 삶을 말로 붙잡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잔에게 경험은 달랐습니다. 그의 경험은 설명되지 않은 채 몸속에 남았고, 감정은 색이 되고 선이 되었을 뿐, 문장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1000015873.jpg 세잔 부인의 초상화

영화에서 졸라는 세잔의 작업실에 와서 초상화를 바라보며 세잔의 부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정함도 사랑도 없는 남자의 초상이네요. 자기 눈동자보다 사과에 더 인간미를 담았어요.”

이어서 세잔의 부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졸라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세잔은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아요.”

이 말은 차갑지만, 세잔의 상태를 정확히 건드리고 있습니다.


세잔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말과 표정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보다 사과에 더 많은 인간미를 담았고, 말을 요구하지 않는 대상 앞에서만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졸라는 다시 말합니다.

“자네는 소질이 있어요. 그런데 초상화에 감정이 없어요. 형제인 내가 말해줘야죠.”


1000015872.jpg 세잔 부인의 초상화

정서적으로 금수저인 사람에게 이 말은 솔직한 조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흙수저인 사람에게 이 말은 또 하나의 평가이자 판결로 다가옵니다.

세잔은 말로 맞서지 못하고, 분노가 쌓이면 붓을 던지고 화판을 찢습니다.

그것은 난폭함이라기보다, 말의 세계에서 이미 밀려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표현처럼 보입니다.


졸라는 이후 더 멀리 나아갑니다. 그는 문학에 머물지 않고, 사회 문제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을 때, 졸라는 공개서한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국가 권력과 사회적 편견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그에게 말은 단지 표현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기 위한 행동 그 자체였습니다.


세잔은 그와 다른 길을 갑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은행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유산으로 세잔은 더 이상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자신을 억압하던 아버지의 돈이 마침내 세잔에게 완전한 고독과 자유를 허락한 셈입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더 깊이 그립니다.

산을 그리고, 사과를 그리고, 강물 속에서 알몸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반복해서 그립니다.


훗날 파블로 피카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잔은 저의 유일한 스승이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세잔은 사회를 향해 외치지 않았지만, 그림으로 한 시대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엑스에 온 에밀을 보기 위해 세잔은 찾아갔다가 이런 말을 듣습니다.

“재능이 있는 친구였지요. 성질만 아니었다면…. 사산된 재능이지만, 안타깝게도요….”

그 말을 들은 세잔은 돌아서서 생 빅투아르 산길을 걸어갑니다.


그 장면은 패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도망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말의 세계를 떠나,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남는 길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이 영화는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말로 풀 수 있었는지,

아니면 끝내 말하지 못한 채

다른 방식으로 버텨오고 있는지 말입니다.


말하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

두 사람은 끝내 같은 언어를 갖지 못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역시

그 둘 중 한 사람의 얼굴을 닮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과거를 회상과 현재 회상하는 교차편집으로 만들어졌습니다.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