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을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걸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난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야,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생각하기
1. <님의 침묵>에서 6행과 관련된 불교 경전<법화경>의 사상은 ?
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정한 이치이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거자필반(去者必反) : 산 사람은 죽고 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니 어떤 것도 너무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2. <님의 침묵>은 일제하의 식민지 상황이 아닌 다른 어떤 괴로운 시대에도 그 시적 가치가 돋보인다.
* 위대한 문학이 그렇듯이 모든 위대한 시는 어느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특정한 독자계층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데, 만해의 시도 그 특유의 종교적 진리, 사랑, 조국애 등이 난해하지 않게 읽힐 수 있는 점으로 보아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널리 애송될 수 있는 시다. 비단 식민지 시대뿐만이 아니라,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그리고 먼 과거나 앞으로 올 행복한 미래에서조차도 괴로운 시대의 고민은 늘 있게 마련인데, 이 시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치유하는 정신의 양식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해의 <님의 침묵>은 시공을 초월해 그 의미가 적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