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 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리고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습니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지라도
용서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가 너 혼자 거기에 있느냐고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 민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긴 전화였다. 하나님 이야기를 한다. 그애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믿지 않던 신의 은총을 생각했다. 무슨 힘이 민아를 저토록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애가 그 아픈 병에서 나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언어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과 비록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어도 그것이라면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바칠 수 있다. 그래서 무신론자의 기도 두 편을 썼다. 18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이어령, 문학세계사, 2008, 20171218)
사랑하는 딸 민아를 위해 이성에서 영성으로 자신을 옮겨가는 과장에서 쓴 시(詩)이다. 어쩌면 이성보다 강한 것이 영성인가보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인이 영성을 접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