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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자서전 Mar 15. 2019

삼무三無 일유一有

  상담대학원의 첫 수업은 낯선 경험이다. 보통의 첫 강의는 교수님 소개와 학우들의 자기소개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에 교수님이 교재를 소개하고, 강의 계획서를 설명한다. 또 첫 만남은 일찍 끝낸다. 이런 패턴으로 환영식과 더불어 첫 강의를 들어왔다. 


  상담대학원이라고 다를 거란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 사뭇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교수님의 강의에는 세 가지가 없다. 강의가 없고, 교재가 없고, 강의계획서가 없다. 말씀하신 걸,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강의가 없다.  
   “강의를 할 수도 있다. 특강을 하면 일류 강사의 수준에 버금가도록 할 수도 있다. 나름 인기 있는 강의를 한다. 그런 강의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편안하게 듣는 강의로는 심리학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여러분이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특강을 듣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심리학자가 될 수 없다.” 

강의를 하지 않고 어떻게 수업이 진행될까 궁금했다. 그런데 수업이 진행됐다. 


  둘째, 교재가 없다. 
   “지금 나와 있는 교재에는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난 이론들이 있다. 심리학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모른다. 책을 읽고 싶다면 읽어라.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이론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여기 있는 물병이 무엇인가? 단순한 물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수가 기침을 하니까 학생이 건네준 물병이다.” 

  내 생각에는 상담이론을 적용하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론은 모두 똑같은 물병이다. 어떤 상담자에 의해서 내담자가 마시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물병이 될 수가 있다.


   셋째, 강의계획서가 없다.  

   수업이 후반전에 다다를 무렵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수업계획서를 만들어 제출하라.”  


  첫 수업이라 긴장했었다. 그런데 노트필기도 금지하고 노트북, 녹음도 금지했다. 긴장감이 더 커졌다. 오직 입과 입, 귀와 귀, 눈과 눈만 필요했다. ‘왜 필기도, 녹음도 금지했을까?’ 첫 수업의 긴장감이 지적긴장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도 생각했다. 교수님이 ‘왜 그렇게 수업을 했을까?’ 

  하룻밤을 자고 나니 어제 수업이 다시 떠오른다. 강의내용을 적으면 말하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가 없다. 집중을 하지 못하면 적극적 듣기가 안 된다. 내담자와 이야기할 때 메모하면서 대화하면 상대에게 집중할 수가 없다. 내담자에게 집중하는 게 상담의 기본이라는 것을 구술(口述)언어가 아닌, 행동언어로 알려주신 것이 아닐까? 


  ‘집중해서 적극적 경청傾聽을 하지 않으면 상담 이론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슈퍼마켓에 걸린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적극적 경청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듣는 것이다. 목소리도 듣지만, 내담자의 신호와 같은 감정을 보아야 한다. 눈의 움직임, 얼굴 표정, 근육의 긴장도, 호흡패턴, 목소리 크기의 변화, 앉은 자세 등과 같은 신체적 신호를 읽고, 느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수업시간에 그런 경험을 요구하신 것 같다. 적극적 경청을 하다보면 몰입할 수 있다.

  몰입을 하면 자타(自他)가 하나가 된다. 몰입은 어떤 과제에 나의 역량을 집중할 때 일어난다. 어려서는 재미와 놀이에 몰입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몰입이 안 된다. 그런 때에 새로운 도전과제가 생겼다.


  첫 수업의 키워드는 ‘적극적 경청’과 ‘몰입’이다. 적극적 경청 훈련은 한두 번의 연습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감정신호로 마음 상태를 알아낼 수 있어야 적극적 경청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몰입은 시간의 질적 향상으로 더 나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려운 도전에도 자신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다. 그걸 알고 나니 잔잔한 울림이 올라왔다. 보물 상자를 열 수 있는 황금 열쇠가 생긴 것 같다.  



  늦은 나이에 배워보려니 부끄럽고 민망함이 있다. 그래도 늙은이를 받아주는 학우들이 고맙다. 나는 왜 배우려는가,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시를 읽어본다. 


  배워라, 나이 예순이 넘은 사람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 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묻기를 서슴지 말라, 친구여

  아무것도 믿지 말고

  스스로 조사해보아라!

  당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모르는 것이다.

        -<배움을 찬양함> 중에서    


  배움은 즐거움, 기쁨 등과 같은 감정을 불러 온다. 배움에는 두근거림, 희열감, 스릴 등과 같은 감정들이 올라올 때도 있다. 배움은 계곡을 건너고, 산등성이를 넘어, 산 정상을 정복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 같은 값진 기쁨을 준다. 기쁨은 즐거움을 만들고, 성취감은 만족감을 높여주고, 만족감은 자존감을 향상시킨다. 

  삶에는 여러 종류의 행복이 있다. 의식주에서 얻을 수 있는 일상의 행복, 인간관계를 통해 얻는 관계의 행복, 여행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는 행복, 그리고 배움으로부터 얻는 ‘앎의 행복‘이 있다.


  오늘도 배웠다. ‘경청과 몰입’을…, 그걸 깨우쳐서 기쁘다. 정신적 행복감이 온다. 

 

  감정을 시간적 측면에서 나눈다면, 갑자기 오는 감정과 늦게 오는 감정이 있다. 갑자기 오는 감정은 예상치 못한 감정이다. 행운을 잡은 ‘로또’같이 급히 찾아오기도 한다. 필연보다는 우연에 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만족감도 높아지지 않는다. 반면에 작지만 좋은 감정들이 모일 때, 행복한 감정이 오래간다.  배움이 그렇다. 입으로 먹는 건 먹을 당시는 좋지만 먹고 난 후에는 배설되고 만다. 반면에 배움을 먹으면 알게 되어 기쁘고, 저장되어 오래도록 유익하다.   
   

  사람들은 일생동안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오래 남는 시간은 따로 있다. 앞으로 상담대학원 2년 반 동안에도 많은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수업 시간에서 얻은 ‘경청과 몰입’이란 깨우침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강의도 없고, 교재도 없고, 강의계획서도 없는 시간이었지만, 첫 수업이 나에게 준 키워드만큼은 오래도록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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