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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갖추어야 할 원칙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by 마음 자서전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박영신, 정재영, 한들출판사, 2007, 190209)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


우리나라에서 초창기 교회는 개혁의 선봉을 이끌었다. 묵은 관습, 신분, 질서, 축첩관계, 음주, 흡연, 도박 등 여러 사회적 인습을 거부하는 교회회원 앞에서 공식적으로 서약하고 위반했을 때는 회원 자격을 잃고 마는 새로운 행동 규범을 준수하는 집단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사회개혁에도 앞장서서, 독립운동에 물신양면으로 지원을 했고, 한의원밖에 없던 나라에 양의사가 있는 병원을 세워 아픈 환자를 고쳐주었고, 양반과 상놈으로 갈라져서 배우지 못하는 상놈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학교를 세워서 주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문명의 선봉장이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 발전에 기여해온 개신교는 새로운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이기적이고 자기만의 편의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몰사회적, 몰윤리적 경향성을 견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인 일임을 알아야 한다.

kp1_071031063700.jpg '작은 교회운동'에서 한국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서발표와 기자회견

우리의 삶을 죄어들고 있는 경제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 결단의 방향은 이제 명백하다. 그것은 기독교의 초월적 가치를 재확인하고 재활용하여 경제주의라는 이 시대의 우상을 부수는 일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물질적이며 외형적인 ‘복(福)’보다는 더 값진 새로운 삶을 보아 좁다란 ‘나’, 좁은 ‘우리’가 아닌 가장 넓은 뜻에서의 ‘우리’를 생각하면서, 인간들 사이에서 또한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그 어떤 것도 어느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고, 모두가 목적이 되는 새 삶의 우주를 펼쳐 보여야 한다. (----)

바로 이러한 새 날과 새 질서에 대하여 증언해야 할 과제가 오늘의 기독교에 짐 지워져 있는 것이다. 128


서강대학교 철학과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있어도 ‘자본가‘는 없고, 국민은 있어도 ’시민‘은 없다.” 고 말했다. 기독교에 패러디하면 “교인은 많아도 참교인은 없다.”


한국 교회가 사회 안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가치에 영합할 것이 아니라, 성서의 본뜻에 대한 기독교적 이상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실천과 참여의 마당에서 현존 질서의 정당성을 언제이고 도전할 수 있는 힘을 뿜어 낼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235

163_1647_2528.jpg 변화하는 다원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자세 세미나

설교가 갖춰야 할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설교 주제와 관련하여 사회 차원의 공공 문제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 종교의 시사화 경향은 설교의 주제를 개인의 안위와 행복, 마음의 평안에 대한 내용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기독교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주제들보다 사회 공공영역에 속하는 주제들에 대한 소재정보를 발굴하는 게 시급하다.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 다른 분야에 대한 공공 이슈에 대하여 기독교 관점에서 접근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둘째, 기독교적 해석을 하는 데에서 지나친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향해야 한다. 지나친 이분법식 사고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사회생활에 올바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여 기독교인들을 분리주의자 또는 배타주의자로 만들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가치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엄격한 윤리 기준을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회생활에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의례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 윤리의 행동 지향성이 삶의 무대 위에서 표출되어 나타나야 한다. 일상의 삶 속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삶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세속 사회의 모든 활동에 대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윤리적 삶의 지침을 마련해줄 수 있는 설교가 필요하다.


셋째, 다원주의 상황에서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과도 공존하고, 그들을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의 힘을 키워서 세력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서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강자 중심의 논리이고, 패권주의의 발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기독교인에게 거부감 없이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대화의 언어이다. 우리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로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는 보편타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누구라도 수용할 수 있는 진리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화의 언어,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설교가 제시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 자체가 기독교인의 사회생활에 대한 정답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여 설교자가 모든 사례에 대한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설교자는 성경의 원리와 성경의 정신에 따른 일반 원칙을 제공할 뿐이며 매일매일의 삶에서 부딪히는 각각의 문제에 대해서는 결국 기독교인 개인의 기독교의 가르침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 가능한 다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설교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할 때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수준에서도 중요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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