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첫사랑과 결혼했습니다 2

by 온시

그것은 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들끓는 마음을 설명하는 최대치의 표현이었다. 유진은 귀한 경험 중이었다. 그 경험은 누군가는 평생에 한 번, 누군가는 평생토록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유진은 해민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애초에 유진은 유진에게는 해민만 보였기 때문에 해민에게 시선을 건네는 일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해민에게 푹 빠져서라기보다는 유진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이 아니면 뭐든지 할 수 있고,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해민이 직접적으로 유진의 마음을 전달 받은 것은 다음 해 화이트데이였다. 화이트데이를 기다려 고백하던 낭만적 시절이 존재했다. 유진은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메신저를 부탁했다. 해민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였다. 친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해민에게 유진의 선물을 건넸다.


“유진이한테 이걸 건네 받다가 내가 떨어뜨렸어. 안 깨졌어야 하는데.”


집에 와서 풀러 본 상자 안에는 노란색 사탕들과 두 동강 난 유리 에펠탑이 들어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 에펠탑은 깨졌지만 해민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란색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조그마한 크기의 사탕을 궁글리니 상쾌한 레몬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같이 담겨 있던 편지를 읽었다. 뾰족한 펜으로 쓴 글씨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조금씩 우상향된 어른스러운 글씨체였다.

해민은 뭐든지 리스트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해민의 일기장에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여러 리스트들이 기록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좋아하는 친구’.... 제목을 적어두었다가 생각 날 때마다 차곡차곡 리스트를 만들어갔다. 자신에 대해 궁금했던 해민은 그 리스트들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해민은 이상형의 조건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첫 번째 조건은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글씨를 잘 쓰는 남자.




곧이어 둘의 첫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다. 연애라고 부르기도 아쉬운 두 달이었다. 둘은 몇 번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여 배달되는 편지일 때도 있었고, 학원에서 다른 사람 메신저를 통해 배달되는 편지일 때도 있었다. 해민의 친구는 유진을 좋아해서 편지로 고백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몇 번은 함께 학교를 가기도 했다. -‘함께’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민은 유진과 단둘이 걷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에 유진은 또다른 친구와 동행해야 했고, 그래서 셋인 채, 누군가 본다면 두 명의 남학생과 한 명의 여학생이 각자 따로 등교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몇 번은 서로의 집에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기도 했다. - 대부분 유진이 해민에게 전화를 걸었고, 예의바른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해민이 친구 유진인데요, 해민이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한 뒤에야 해민에게로 연결되었다.-


해민은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오는 유진의 목소리가 좋았다. 이미 변성기를 통과한 유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언젠가 아주 드물게 해민이 유진의 집에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유진의 엄마가 전화를 받았으므로 해민 역시 예의 바르게, “안녕하세요, 유진이 친구 해민인데요, 유진이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거짓말하지마. 해민이가 왜 전화를 해.” 같은 말이 어렴풋이 들렸기 때문에 해민은 조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유진은 잠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평소보다 조금 느릿한 음성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 일을 당한 사람의 의아함이 묻어나 있었다. 해민은 이상형의 조건을 하나 더 추가했다.


목소리가 좋은 남자.




해민이 이상형의 조건을 다섯 개쯤 적었을 때 해민은 유진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해민조차 이유를 몰랐다. 유진과 사귄 이유도 알지 못했지만 헤어지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유진은 낙관했다. 열여섯 해의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었다. 유진은 몇 번의 선물과 붙잡음이면 해민이 다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커다란 곰인형을 들고 해민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비가 내렸으나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으므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해민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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