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첫사랑과 결혼했습니다 4

by 온시

유진의 고등학교 교복 와이셔츠는 초록색이었다. 바지까지 회색이어서 어느 공장의 유니폼 같았다. 머리는 빡빡 밀지 않았다. 까까머리가 아닌 남고생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유진은 머리를 미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새벽 6시 등교를 2년째 고수 중이었다.

길의 저쪽 끝에서 유진이 나타났을 때부터 해민은 유진을 알아봤고, 주위에 도통 관심이 없던 유진은 그저 무심히 길을 걷던 중이었다. 유진은 초록색 와이셔츠를 입고 여전히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해민은 유진이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참지 못한 웃음이 비죽비죽 입가에 솟아오를 때쯤 유진도 해민을 알아봤다. 웃고 있는 해민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해민 앞으로 다가왔다. 해민은 유진의 표정에 절망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이야?”


해민은 일상처럼 물었다.


“어. 너는?”


유진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도.”


해민은 유진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몸짓을 취했다. 유진이 얼떨떨한 마음으로 걸음을 뗐다.




유진이 다니던 학교에서 10분쯤 걷다 보면 해민의 학교 후문 골목이 나온다. 유진은 해민의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릴 자신은 없었다. 9시 10분이 되면 수백 명의 여고생들이 쏟아졌다. 유진은 골목의 끝 슈퍼에 서서 해민을 기다렸다. 그쯤이면 수백 명의 여고생이 수십 명의 여고생으로 줄어 있었다.

해민은 종이 치면 공부하던 책과 노트, 연습장 등등을 척척 닫고 가방을 메고 쏜살같이 학교를 나섰다. 해민의 가방에는 등이 배기지 않게 세워둔 납작한 책 한 권뿐이었다. 집에서는 도통 공부하지 않았다.

유진이 오늘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오늘부터 기다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을지 어느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해민은 교문을 나서자마자 골목의 끝을 눈으로 더듬었다. 유진은 언제나 그 끝에 서 있었다. 해민이 몰랐던 것은 유진이 해민을 만나기 위해 언제나 야자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를 나선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10분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하루가 마치 그 시간만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가끔 길을 걷다 해민은 휙 몸을 돌려 뒷걸음으로 걸었다. 유진의 얼굴을 바라본 채였다.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쉼없이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유진은 해민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넘어질까 위태로워 보이는 해민에게 확실한 안전장치를 제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은 욕심 내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해민의 미소를 볼 수 있고, 해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럴 수 없었던 시절의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 연재
이전 03화열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