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 1

by 온시

“여보가 전화를 건 날 있잖아. 진짜 신기했어. 내가 그날 필리핀에서 막 귀국해서 하루인가 이틀인가 지났을 때였거든. 내가 필리핀에서 돌아온 걸 아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는데 전화가 울리는 거야.


필리핀 간 이유? 취업 대비 어학 실력 향상?


필리핀에서 내가 좀 다쳤어. 비 오는 날에 뒤로 넘어졌는데 이게 뇌진탕이었거든. 그래서 계획보다 일찍 귀국했고, 그때 여보가 전화를 건 거야. 우리가 그때 거의 연락이 없을 때였잖아. 나는 그때 요양차 부모님댁에 내려와 있었고,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잖아. 아파서 일찍 귀국했다고 하면 여보가 안 만나 줄까봐 뇌진탕이라고는 절대 이야기 안 했지.”





“여보가 전화를 건 날 나한테는 되게 중요한 강의가 있던 날이었어. 시험을 아주 어렵게 내기로 정평이 난 교수님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시험 전에 써머리 강의를 해 주신다는 거야.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고 서둘러 학교에 갔지. 제일 앞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싶었으니까.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여보한테 전화가 왔어. 너무 웃긴 건 내가 한 순간도 고민이 없더라. 그냥 핸드폰 들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어. 그리고 다시 강의실에 들어가지 못했지. 그날 우리가 꽤 긴 통화를 했을 거야.


시험? 시험은 뭐 망쳤지. 근데 하나도 아쉽지 않았어. 정말 하나도.”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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