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7년 간의 서울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진의 회사는 유진과 해민의 고향 근처 소도시에 있었다. 유진은 평일에는 회사에서 마련해 준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주말에는 해민이 있는 도시로 와 본가에 머물렀다. 유진의 주말 일과는 해민을 만나는 일이었다.
해민은 금요일 오후가 견딜 수 없이 지루했다. 오전까지는 잘 가던 시계도 오후가 되면 눈에 띄게 더듬거렸다. 시계를 너무 자주 봤다. 유진이 어서 퇴근해서 자신 앞에 나타나길 바랐다. 둘은 금요일 밤마다 만났지만, 해민은 종종 유진이 도착하는 시각을 착각했다. 유진은 8시쯤에 도착했지만 7시 반에 도착한다거나, 6시 30분에 도착한다고 착각하고 미리 발을 동동 굴렀다.
둘은 동네에서 만났다. 둘의 본가는 모두 여전히 중학교 때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 있었고 여전히 이웃사촌이었다.
유진은 왼쪽으로 약간 얼굴을 기울인 채 걸어왔다. 출근 복장 그대로였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놓고,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해민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해민을 보고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미소를 참을 수 없는 쪽은 해민이었다.
유진이 해민을 바래다 줄 때 해민은 길눈이 어두운 유진을 자주 속였다. 조금 더 돌아가는 쪽을 택해 유진과 함께 걷는 시간을 연장했다. 유진은 ‘이런 길이 있었네. 전혀 모르겠다.’며 해민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둘은 언제나 해민의 집이 있는 골목 어귀에서 헤어졌다. 해민이 유진에게서 등을 돌려 걷다 용기를 내 뒤를 돌았을 때 유진은 없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유진은 자신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계속 그대로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민은 조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해민의 주변 사람들이 유진의 존재를 알아갔다. 해민은 짐짓 모른 채 하고 있었지만 유진과 해민은 누가 봐도 어떤 수순을 밟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해민과 유진이 함께 학원을 다녔던 중학교 시절, 그 시절에 해민과 유진 사이 메신저 역할을 했던 해민의 친구, 그리고 여전히 해민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M. 유진은 어째서인지 M을 보고 싶어 했다. 셋이 함께 만났을 때 M과 유진은 꽤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둘 사이에 반가움이라는 감정은 강력하게 느껴졌다. 둘은 해민을 통해 서로의 안부는 다소 들었겠으나 10년 만에 대면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유진을 반가움의 감정으로는 대할 수 없었던 해민은 둘 사이에서 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더 큰 문제는 유진이 해민을 바래다 주면서 생겼다. 유진은 내내 M 이야기를 했다. M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M이 예뻐졌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
해민은 점점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점점 말수가 적어졌지만 유진은 눈치채지 못했다.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계속 신이 나 있었다. 해민은 잔뜩 흥분한 듯한 유진의 말허리를 툭 잘랐다.
“나 들어갈래.”
유진은 깜짝 놀랐다. 해민과 함께 할 시간이 좀 더 남았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매듭 지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된 신비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유진은 내친김에 그 옛날 보습학원의 원장 선생님을 찾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선생님께 자신과 해민이 이렇게 자라 여전히, 아니 어쩌면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M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해민이 한 말이라고는, “나 들어갈래.”
“지금?”
“응, 지금.”
“그래, 알았어.”
해민이 왜 갑자기 차가워졌는지 유진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