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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의 Jun 16. 2024

편견과 통찰 사이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한 남자의 프로필을 카톡으로 전달해 왔다. 얼마 전 엄마와 친해진 아주머니가 결혼 정보 회사의 커플 매니저여서, 엄마에게 한 번 검토해 보시라며 넘긴 프로필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선을 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거절할 거였지만 짧고 간단한 내용이니 한 번 읽어 보았다. 


개인정보여서 자세한 내용은 언급할 수 없지만, 대략 ‘나이 30대 중반, 키 180대 중반, 미국 유명 디자인 스쿨 휴학, 국내 유명 경영대학원 재학, 부친: 모 중소기업 대표이자 건물주, 자택 강남구, 그 외에 본인은 빌라 여러 채와 차 여러 대 소유’ 등의 내용이었다. 


프로필을 보고 즉각적으로 ‘디자인 스쿨을 아직까지 휴학? 도피성 유학 다녀온 부잣집 아들 같은데. 타고난 배경의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이룬 건 별로 없을 것 같다. 정말로 이런 조건에 지금까지 결혼을 못 했다면 성격이 문제였을까? 좀 재수 없는 스타일일지도?’ 까지 생각하고서, 나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음에 불현듯 놀랐다. 몇 줄의 소개만 보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멋대로 단정지었고, 특히 편협하고 속물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고 평가를 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그냥 집이 부자인 사람일 뿐,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기의 삶을 살아왔을 수도 있었고, 뭔가 다른 사정이 있어서 지금까지 결혼을 미뤘을 수도 있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뭘 안다고 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평가했지? 






나도 다른 사람이 나의 단적인 면모만 보고 나라는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걸 싫어한다. 특히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나의 실제 모습과 괴리가 있을수록 왠지 억울하기도 하고, 자기가 만든 틀에 나를 멋대로 가두려는 게 조금은 고깝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멋대로 평가하는 게 탐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 역시도 똑같이 내 기준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 켠이 불편하다. 그리고 가끔은 무의식 중에 속으로 어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얕잡아 보는 것을 자각하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사회의 때가 본격적으로 묻고 나니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는 것이 점점 느껴진다. 사람들을 많이 겪어 보며 나에게 일종의 빅 데이터가 쌓이게 되었다. 습득한 빅 데이터는 경험과 지혜가 되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데이터들도 함께 유입되면서 편향과 아집이 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던 예전에 비해서, 점점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습관대로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종종 발견하게 됐다. 이대로 가다간 빅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식이 협소하고 고루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




사람들은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름의 판단을 내린다. 타인을 좋게 평가하든, 나쁘게 평가하든 그 행위의 본질은 비슷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제한적인 정보를 활용해 ‘저 사람은 이럴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효율을 좋아하고, 주어진 단서에 최소한의 노력으로 답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빠르게, 더 잘 알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타인에 관한 정보를 이리저리 조합해서 특정한 인간 상을 만들어 낸다.                                                                                                                       


“나는 사람을 잘 보는 편이야.”, “나는 쎄한 사람을 잘 거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감’이라고 불리는 직관이 유독 발달해 있거나, 관찰력이 뛰어나 다른 사람이 미처 못 본 사소한 지점들을 찾아낼 수 있거나, 또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아서 추론 능력이 좋은 케이스이다. 그런 이들은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다’ 라는 말을 듣는다. 더 나아가 사람을 잘 파악하고 상황에 맞게 대하면 ‘눈치가 빠른 사람’ 또는 ‘센스 있는 사람’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가 사람을 잘 본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뇌는 사람들을 유형화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MBTI 등의 척도에 따른 분류가 많이 활용되고, 보수/진보, X세대 등의 구분도 있다. 그 외에 상대방의 언어와 행동, 관심사와 취향 등도 판단 요소가 된다. 


사람들을 유형화하고 그 경향성을 더 빠르게 파악한다거나, 특정한 취향이나 패턴 등을 알아내는 것 자체는 대개 선한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MBTI를 물어보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해서 좀더 빠르게 파악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을 쉽게 알기 위함이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친해질지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기존의 경험을 통해 가지게 된 부정적인 각인이, 비슷한 상황을 접했을 때 똑같이 부정적인 패턴으로 다가올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도가 선하든 선하지 않든 과연 타인에 대한 판단을 효율적으로 내리고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옳은 것일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맞추기만 한다면 타인을 마음대로 판단해도 되는 걸까? 나도 나를 100% 모르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타인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정당성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속으로는 내 맘대로 평가를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으면 상대방이 어차피 모르니까 상관없는 걸까?


타인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법과 그에 대한 기준을 만드는 것은 너무 어렵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면모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간과하면 사람을 평면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사람들을 과도하게 유형화하다 보면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더 나아가, 평가 기준이 지나치게 편향된 일부 사람들의 ‘공부 못하는 애들이랑 놀지 마라’, ‘여자들은 임신하면 그만두니까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 와 같은 편견은 단순한 개인의 가치관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의 통합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통찰’과 ‘편견’은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기준이나 사회적 통념에 맞춰 해석하게 되면서 통찰과 편견의 경계를 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편견(=prejudice)’이라는 단어를 뜯어 보자면 ‘미리’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pre-’와 ‘판단하다’ 라는 뜻을 가진 ‘judge’에 어원을 두고 있다. 언어를 형성해온 수많은 과거의 사람들도 미리 판단하는 것이 편견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통찰과 편견의 경계는 무엇일까? 의외로 흔한 관점인데, 제한된 정보와 단편적인 인상을 바탕으로 빠른 판단을 내렸을 때, 평가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할 만큼 맞게 판단했다면 ‘통찰’로, 그 내용이 틀렸다면 ‘편견’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기준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관점이다. 



핵심은 ‘개방성’과 ‘유연성’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지속적으로 돌아보고, 내 판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잘못된 판단은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타인의 다면적인 모습을 인정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자칫하면 ‘편견’이 될지도 모르는 판단을 ‘통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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