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많이 내린다. 아침이 올까, 싶은 어둠이었는데 서서히 톤이 밝아지는 창밖이 신기하다. 스마트폰 사진에 명암을 조절하듯 그렇게 빛이 물들기 시작한다. 아침의 냄새가 난다.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났다. 새벽에 일어나서 무작정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처음에는 노트에 연필로 적었는데 옮기는데도 시간이 꽤 걸려서 엊그제부터는 바로 노트북을 열고 쓴다.
어떤 글이 될지 모른 채 첫 문장을 시작하고 나면 명사와 동사가 채워지고 한 편의 일기가 된다. 글을 쓰는 게 너무 막막해서 한참을 미뤄두다가 괜히 찜찜해지곤 했는데 어떤 글이든 매일 쌓인다는 게 안정감을 준다. 질 보다 양을 추구하는 마음이랄까. 질을 높이려고 하니 자꾸 뒷걸음질하게 되고, 미루게 된 것 같다. 좋든 싫든 원래의 나로 돌아오니 편안하다.
식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바나나가 자꾸 눈에 들어오고, 냉장고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생각난다. 바나나와 아이스크림이라면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 눈뜨자마자 아이스크림은 좀 아닌 듯 하지만, 이 문장을 쓰고 나면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일어나서 바나나를 종종 썰고, 아이스크림 두 스푼(아니 세 스푼) 정도 퍼오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나나 + 아이스크림 = 맛있다!
역시 바나나와 아이스크림의 조합은 완벽하다. 고3 때 독서실 앞에 돈가스와 빙수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하다가 9시 즈음 몇몇 친구와 나가서 과일빙수와 치즈 돈가스를 두 개 시켜서 나눠먹곤 했다. 치즈향을 품은 바삭한 돈가스와 대접에 넉넉하게 담긴 과일빙수. 왁자지껄했던 장면들이 생생하다. 이렇게 바나나를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으면 어김없이 당시의 활기가 생각난다.
새벽마다 읽고 있는 책(혹은 읽은 책)을 펼쳐서 나누고 싶은 문장을 고르는데 오늘은 정혜윤 작가의 『마술 라디오』속의 문장을옮겼다. 표지부터 속지까지 노란 책이다.(바나나에 마술 라디오가 더해지니 오늘 일기의 분위기는 노랑노랑이다.) 이 책은 내가 유독 사랑하는 책 중에 한 권인데 정혜윤 작가가 겪고, 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다. 거대담론 속에 묻혀버릴 수 있는 반짝이는 이야기다.
그는 도쿄대학교 법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땄어. 그러고는 노숙자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어.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한 가지 질문이었어.
"저에게는 지적장애인 형이 있어요. 나와 어머니가 돌봤죠. 형은 혼자서 외출할 수도 없고 산책할 수도, 목욕할 수도 없었죠. 나는 나랑 어머니가 없어도 형이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질문을 던졌고 상상해봤죠."
이 눈부시게 정력적인 활동가이자 용기 있는 동생의 마음은 사랑에서 시작된 질문으로 몇 배나 아니 몇 만 배가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중이었던 거지. 그는 촘촘하게 엮인 세상을 상상하는 듯했어.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그물을 짜고 있었어. 아이 하나가 어쩌다가 떨어져도 누군가는 받아주는 세상 말이야. 살리고 살리는 살려내는 세상 말이야. (109쪽)
- 정해윤 『마술 라디오』(한겨레 출판, 2014)
"살리고 살리는 살려내는 세상"이라니. 나는 마술 라디오를 읽은 후부터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 아이들과의 하루 속 에피소드, 내가 겪지 않은 시절의 고단한 이야기까지.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빛나는 순간을 알아채고 슬며시 웃기도 하고, 가끔 슬퍼지기도 한다.
책의 문장을 공유하며 새벽을 함께 맞는 분들이 마술 같은 하루를 보내길 바라본다.
새벽 문장
우리는 일상이 자신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서 괴로워하지. 일상의 소소함이 더 큰 무엇인가로 이끌어주지 않아서 괴로워하지. 행복이란 상상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높은 곳에 있는 내가 모르는 남들의 시선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지상, 식탁, 책상, 잠자리, 산책길, 자전거, 책 속에 있겠지.(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