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짧은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로 오도 가도 못하다가 마음먹고 결정한 여행이었다. 안면도에 있는 작은 펜션에서 머물기로 했다. 너른 마당이 있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 제격이었고, 오른쪽에는 바다, 왼쪽에는 저수지를 끼고 있어서 남편이 낚시하기에도 좋았다. 복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조용히 책을 읽기에도 적당했다. 가족 각각의 필요를 충족해줄 만한 장소였다.
숙소 앞에서 찍은 사진, 탁 트인 저수지에서 낚시도 할 수 있다.
안면도로 향하는 길, 내비게이션을 켜고 출발했다. 길 안내 음성이 "세종대왕"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일곱 살 아들이 재미있어해서 바꿔둔 터였다. 우리는 세종대왕님의 안내를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오른 돌기를 하여라." "왼 돌기를 하여라."
어쩐지 세종대왕님을 모시고 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대왕님의 진가는 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드러났다. 안면도 안쪽에 위치한 숙소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시골길이라 내비게이션을 보면서도 진입해야 하는 골목이 헷갈렸다. 얼떨결에 길을 잘 못 들어가면 대왕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허 길을 잘못 들었구나, 허나 괜찮다."
왕 특유의 여유로움이 배어 나오는 "허나 괜찮다."라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괜찮다고 해주시니까 진짜 괜찮은 것 같았다. 운전을 하던 남편도 "세종대왕님이 아주 긍정적이시네~"라고 말하며 차분하게 길을 찾았다. 예전에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불평하곤 했는데 대왕님과 함께하니 편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펜션에서는 짙은 편백나무 냄새가 났다. 짐을 풀고 남편은 낚시를 했고, 나는 종일 책을 읽었다. 아이들은 실컷 TV를 보았고 마당과 낚시터를 신나게 오갔다. 해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 여유가 아쉬워서 1박 2일로 계획한 여행이었지만 과감하게 하루 더 머물렀다. 기억에 오래 남을 여행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 2주가 지났다. 이른 새벽에 지난 여행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요즘 자주 세종대왕님의 음성을 떠올리게 되어서다. 회사에서 업무가 잘 안될 때, 챙겨야 할 일을 잊어버렸을 때, 아이들에게 소홀했을 때도 자꾸 대왕님 목소리가 들린다.괜찮다는 말이 삐걱거리는 하루를 부드럽게 해 준다.
"허나 괜찮다. 길을 다시 찾아보자."
오은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 중이다. 『다독임』이라는제목답게 마음을 토닥여주는 책이다.(마치 세종대왕님처럼.) 괜찮지 않은 날들을 괜찮게 보낼 수 있으려면 말의 힘을 입어야 한다. 괜찮다. 길은 결국 찾게 되어 있으니까.
새벽 문장
옷을 입는 것처럼, 나는 매일 힘입는다. 철에 맞는 옷이 따로 있는 것처럼, 사는 데는 알록달록한 힘이 필요하다. 꼭 커다랗지 않아도 된다. 자잘해도,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아도 그 힘은 공기처럼 나를 감싼다. '힙입다'라고 소리 내어 발음해본다. 무엇보다 힘을 옷처럼 입을 수 있다니, 꼭 슈퍼맨이나 배트맨의 슈트처럼 근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