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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Nov 11. 2020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오늘,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원더풀 라이프>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 중에서




오늘 밤은 달이 참 예쁘네요.

달은 참 재미있죠?

실제 모양은 변하지 않지만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보이니까.


매주 영화를 보고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각자의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모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들의  번째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8)는 어떤 모양의 달들이 빛나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저도 조심스럽게 제가 본 달의 모양에 대해 말해 볼게요. 가을날 저녁 모닥불을 앞에 두고, 영화 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요.


이번 영화는 놀라웠어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따듯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생이 끝나고 사후세계로 가는 길목이 영화의 배경이에요. 영화에는 표현되지 않지만, 삶과 죽음의 다리와 같은 이 세계를 '림보'라고 부른다고 해요. 사람들은 림보에서 7일간 머무르면서 사후 세계로 가져갈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고, 림보에서 일하는 이들은 그 추억을 듣고 재현해주게 되지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하루하루 지나가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에서 가져가게 될 단 하나의 기억을 회상하게 돼요. 전차 맨 앞에 앉아 열린 운전석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은 기억, 전쟁이 끝난 후 행방불명된 연인과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났던 기억, 좋아하는 그 애의 가방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는 순간 등등 언 듯 사소한 것 같지만 소중한 찰나를 듣는 일은 영화를 보는 내내 좋았어요.


모치즈키, 사오리, 가와시마 등 림보에서 일하며 사람들의 추억을 들어주는 이들의 다정한 모습도 인상 깊었어요. 이야기를 잘 꺼낼 수 있게 무릎을 꿇고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추기도 하고, 추억을 찾는데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거든요. 그 순간 친밀하고, 부드러워지는 공기를 스크린 밖에서도 느낄 수 있었어요. 그중 가와시마의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아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할머니 곁에 가서 그는 물어요. "벚꽃 좋아하세요?" 그리고는 "저도 벚꽃을 아주 좋아해요."라고 말하며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진을 꺼내요. 가와시마가 어린 딸 사쿠라코를 보며 미소 짓는 사진이에요. 4월에 태어난 예쁜 아이, 3살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이 사쿠라코.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 중에서


사진을 보며 그는 다시 말해요. "여기 온 지 3년이 됐으니까 지금 6살이겠네요. 할머니가 키우고 있는데 걱정돼 죽겠어요. 추석 때 말고는 보러 갈 수 없거든요. 스무 살 성인식까지는 지켜보려고요. 앞으로 14년 남았네요. 그때까진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려고요.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거예요. 내가 죽었을 때 3살이었는데..." 그는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하지 못했어요. 그러면 떠나야 하고, 떠나면 더 이상 딸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줄 수 없거든요.


영화의 중반쯤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어떤 추억을 가져갈까 고민하면서, 아이들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되짚었어요. 콩알만 한 심장 소리를 듣던 날, 품에 처음 안았던 날, 바닷가 여행에서 방파제를 등지고 엄마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떠올려봤어요. 그런데 가와시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알았어요. 저 또한 한 가지 기억만을 안고, 떠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요. 가와시마처럼 다른 이들의 추억을 재현하는 일을 도우며, 매년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게 되겠지요. 그게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거니까.




오늘 밤도 달이 참 예쁘네요.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달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볼게요. 실은 영화 속에 나온 대사였어요. 수수께끼 같은 대사를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봤어요. 눈치채셨겠지만, 이 영화에서 저의 빛은 가와시마에게 닿았던 것 같아요. 몇 년이 흘러 다시 영화를 보게 된다면 또 다른 모양의 달을 보게 되겠죠? 당신은 어떤 모양의 달을 보셨나요? 이제 들려주세요.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눈 맞출 준비가 다 되었거든요.


http://naver.me/Fn6Ulfay

* 네이버 오디오 클립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함께하며 쓰는 글입니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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