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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Nov 04. 2020

나는 양이다

[오늘, 영화] 그리머 해커나르손 <램스>(Rams, 2015)


https://youtu.be/iIPk_tWtanU



"나는 태어난다. 꼬리가 잘린다. 이빨이 뽑힌다. 나는 갇힌다. 그곳에 오물이 쌓인다. 더러워진다."


<질병 X 시대, 동물들의 시국선언> 영상에서 돼지 역을 했던 이슬아 작가의 말이다. 이 퍼포먼스에는 동물의 권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애써온 예술인,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의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애통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시점으로 보는 세계는 끔찍하고, 잔혹했다. 한동안 동물권을 다룬 책들을 찾아 읽었지만 그때뿐이었고, 생각은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물들의 시국선언'을 접하고 난 뒤로는 일상을 조금씩 바꿔보 중이다. 환경친화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알면 알수록 어렵다. 시도와 실패를 매일 반복한다.




이번 주에는 '그리머 해커나르손' 감독의 영화 <램스>를 보았다. 설원이 펼쳐진 아이슬란드 시골 마을에서 양 떼를 기르며 살고 있는 '키티'와 '구미'는 40년 동안 말을 섞지 않는 형제다. 질투와 증오의 골이 깊어, 회복은 불가능해진 지 오래다. 어느 날 키티의 양에게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발병되고, 전파를 막기 위해 인근 지역의 양들을 전부 도살하라는 정부 조치가 내려진다. 살처분 결정 앞에서 두 형제는 절망한다. 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동생 구미는 검역 당국의 눈을 피해 예닐곱 마리의 양을 지하창고에서 기르지만 그것도 잠시, 끝내 발각되고 만다. 어떻게든 남은 양들을 구하기 위해 두 형제가 의기투합하면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수십 년 간 단절되었던 형제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배경인 아이슬란드의 쓸쓸하면서도 광활한 풍경 역시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묘미다.


아이슬란드의 가을과 겨울 <램스(2015)>




정작 내 시선은 다른 곳을 따라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 양들의 고통이 보이고, 양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형제는 양들사랑하지만, 양들에게는 티끌만큼의 안락도 없어 보였다. 인간에 의해 길러지다, 끔찍한 질병에 걸리고, 살처분되어야 하는 양의 생애가 비참했다. 영화가 전하는 다른 울림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글의 방향의 잡았고 어떤 작품이든 감상은 관객의 몫이라고 믿으며 썼다. 이 글의 첫머리를 '동물들의 시국선언'으로 시작한 이유는 양의 목소리를 글의 말미에 붙이고 싶어서다. 영화를 본 뒤. 지극히 동물의 입장이 되어 써본 글이다. 동물권이 인간의 생계와 상충되는 등 간과하기 어려운 지점에 대해서는 숙고해야 할 과제로 남겨둬야겠다.



나는 양이다. 아이슬란드에 살고 있다. '텅 빈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축사다. 비좁고, 더러운 이 곳에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 먹고, 싸고, 교미한다. 나는 매년 우수 양 선발대회에 나간다. 다리 18점, 엉덩이 8점, 등 9점. 내 몸은 함부로 주물러지고 점수 매겨진다. 누굴 위한 대회인가? 양 한 마리가 전염병에 걸렸다고 한다. 나는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고 했다. 살고 싶다. 너무 살고 싶다.

인간들은 자주 말했다. 얼음과 불밖에 없는 이 나라에서 양만큼 큰 역할을 한 것은 없다고, 1천 년 동안 인류의 구원이자 친구로 함께 살아왔다고. 친구? 인간들의 착각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친구로 생각한 적 없다.


http://naver.me/FgtjHKIk

* 네이버 오디오 클립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함께하며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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