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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Dec 24. 2020

소설 읽기와 넷플릭스의 상관관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X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하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헤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 2019)라는 소설에 향한 나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문장 같았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 소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애 첫 독서모임의 세 번째 책, 그것은 그저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연한 녹색창을 열어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jano)를 검색한다. 그의 옆모습이 보인다. 백발의 짧은 머리, 짙은 뿔테 안경, 깊은 눈매 그리고 앙다문 입. 1945년 7월 30일 프랑스 태생 소설가인 그의 수상경력은 화려했다. 1975년 리브레리상, 1978년 공쿠르상, 1984년 프린스 피에르 드 모나코상, 2000년 폴 모랑 문학 대상, 2014년 노벨문학상까지. 상이 주는 권위에 압도되면 안 된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알아보자.


그의 생애를 깊이 있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지식백과의 문을 연다. “1945년 프랑스 불로뉴 비양쿠르에서 이탈리아계 유대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커다란 산을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문장이다. 수많은 나무들이 산을 이루듯, 수많은 이야기들이 한 문장 안에 뿌리박고 있을 것이다. 이어서 그가 발표한 다양한 작품들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다. 에투알 광장, 외곽도로, 슬픈 빌라, 잃어버린 거리 등 다양한 작품들 사이에서 유독 빛을 내는 문장이 보인다. 한국외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는 김용석 교수의 설명을 인용한 글이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자기 자신의 과거, 보다 정확하게 그가 태어난 1945년을 전후한 과거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 점령기는 그의 작품에서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박해의 대상이었던 유대인 신분의 아버지가 검거를 피하기 위해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면서 도피 생활을 해야 했으며, 프랑스 국적을 갖지 못했던 어머니 역시 비슷한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들 부부는 모디아노를 낳았을 때 가족 수첩에조차 자신들의 본명을 기입하지 못하고 가명을 적어 넣어야만 했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모디아노에게 있어서 과거는 반드시 그가 되찾아야만 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중요한 단서를 손에 쥐고,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간다. 문장 사이사이가 어둡고, 희미하겠지만 괜찮다. 함께 빛을 밝히며 걸어갈 벗들이 있으니까.





둘, 제2차 세계대전, 잔혹한 역사를 이해하다



하나의 작품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려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프랑스 현대사의 단면을 잘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그 배경을 공부하고 싶었다. 소설이 동기 부여가 돼서 역사를 이해하고 싶어 지는 마음을 좋아한다. 자주 드는 마음이 아니기에 왔을 때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열여덟 살에 이런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서 세계사 수업을 들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서른일곱 살이면 어떠리.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는 상투적인 진실을 생각한다. 백과사전을 통해 다양한 텍스트를 찾아 읽었다. 당시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검색했다. 그러던 중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다큐멘터리인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발발한 사건 중에서 핵심적인 사건을 선정에 10부작으로 담아낸 프로그램이었다. 실제 전쟁 영상을 컬러로 복원해 생생한 전황을 보여주고,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해설을 덧붙이는 방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낳은 전쟁이라고 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인근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 연합국 간에 발생한 치열한 전투였다. 다큐멘터리는 1. 진격전  2. 영국 본토 항공전  3. 진주만  4. 미드웨이 해전  5.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6. 디데이  7. 벌지 전투  8. 드레스덴 폭격  9. 부헨발트 수용소 해방  10. 히로시마 등 10대 사건의 내용과 역사적 맥락을 면밀하게 분석해서 보여준다.


각 국의 이해관계가 치밀하게 맞물리면서 군인부터 민간인까지 인명 피해가 늘어가는 모습이 참혹하게 다가왔다. 특히 부헨발트 수용소 해방 관련 다큐멘터리는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나치 독일의 극악무도함에 놀라 영상을 보는 내내 몸에서 힘을 뺄 수 없었다. 몇 권의 책을 통해서 상상했던 장면보다 훨씬 더 처참해서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초래된 수만 명의 희생 역시 대면하기 힘들었다. 관념적으로 존재했던 전쟁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주 남짓한 시간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상을 보면서 전쟁이 남긴 상흔을 어렴풋하게 실감했다. 자주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뒤에도 한참 동안 두려웠다. 며칠 전에는 총성으로 가득한 전장에서 적이 던진 폭탄에 맞았다. 몸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이렇게 죽는구나, 하던 찰나에 잠에서 깼다. 전쟁 영상만으로도 일상의 한축이 무너지는데 그 전쟁을 겪으며 살아가는 생은 얼마나 무섭고, 참혹할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전쟁 전후의 프랑스 거리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다니는 주인공 ‘기 롤랑’, 이제 그의 걸음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셋, 과거를 잃어버린 ‘기 롤랑’, 타자의 기억 속에 남은 그의 조각들



남자는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로 흥신소로 찾아가 탐정 위트를 만난다. 위트는 그에게 ‘기 롤랑’이라는 이름이 적힌 신분증과 여권을 건네며 말한다.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 나와 함께 일을 했으면 하는데, 어떻소······” 그날 이후로 팔 년을 함께 일했다. 과거 없이는 현재도 미래도 한낱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야기는 흥신소 탐정 위트가 은퇴를 선언하고, 기 롤랑이 자신의 기억을 찾기로 마음먹으면서 시작한다. 기 롤랑이 타자의 기억 속에 남은 자신의 조각들을 찾아 맞춰나가는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폴 소나쉬체, 장 외르퇴르, 스티오파, 게이 오를로프, 월도 블런트, 하워드 드 뤼즈, 드니즈 등등 기 롤랑과 연결된 누군가의 흔적을 좇으며 단서를 찾는 방식으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이 결론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인물과 문장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써보기로 했다. 기 롤랑이 만나는 인물들은 대체로 협조적이지만 허무하고, 무미건조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에는 대체로 짙은 그림자가 배어 있다. 기 롤랑은 지난날 자신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게이 오를로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의 전남편인 피아니스트 월도 블런트를 만나게 되는데. 어느 호텔 바에서 그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특유의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나는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지난날 어느 한때는 그래도 그가 피아노 연주를 할 때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56쪽)


앞선 문장이 지나간 과거의 허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부분이라면, 기억을 맞춰가던 기 롤랑이 위트와 나눴던 대화를 회상하는 문단은 어쩌면 이 소설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간혹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과 존재가 낯설어지는 순간이랄까, 설명하기 힘든 기분을 설명하는 정확한 문장을 만난 듯했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 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74쪽)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하는 찰나가 이야기 곳곳에 있다. 무채색에 가까운 분위기 안에서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는 문장들은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묘미다. 인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문장에 색이 많이 입혀져 있는데, 덕분에 인물이 기억되는 순간이 생생해진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혀로 손가락에 침을 묻혀 페이지를 넘겨가며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푸른 눈에 피부가 허옇고 뚱뚱한 그 금발의 남자가 초록색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33쪽) 그저 스쳐 보낼 수 있었던 장면들도 마찬가지다. 색으로 표현되는 묘사는 방치되어 있던 감각을 깨운다. “흐릿한 녹색천의 낮은 안락의자들, 그보다 더 희미한 녹색 꽃무늬 천으로 싸인 소파는 그 전체에 작고 아담한 집안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빛은 벽의 금빛 등에서 오고 있었다.”(147쪽) 


매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마음의 책장에 꽂게 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눈이 어둠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견디는 과정과 같았다고 생각한다.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공부하고, 독서 모임을 통해 소설 속을 함께 거닐고, 매일매일 오롯이 감각하며 겹겹이 읽었다. 끝으로 김화영 번역가의 해설 잃어버린 과거의 신기루를 찾아서를 펼친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다. 볼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추억을 완성할 수 없다면 살아서 무엇하나? 그러나 살지 않는다면 추억해서 무엇하나? 가장 헛되이 바스러져서 망각의 무로 변하는 우리들 삶을 가장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은 바로 이런 점에서 어떤 모럴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일생의 기나긴 자서전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그 지속적 시간 끝에 남는 무無를 고려할 때, 차라리 이 확실하고 찬란한 현재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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