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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Apr 16. 2021

꽃봉오리 열리듯 살아오는 내 사람아

허은실 「꽃 찾으러」, 『기억의 목소리』(문학동네, 2021)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연둣빛 잎들이 피어납니다. 여린 잎들의 싱그러움에 눈이 말개지다가도 불씨가 사그라들듯,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작아지는 4월이네요.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아 먹먹해지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두 아이와 함께하는 틈틈이 시와 소설을 읽으며 지내고 있어요. 짧은 일기를 쓰고요. 자꾸만 넘치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매일 만보씩 걸어요. 의사 선생님이 산책을 권하셨는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서야 시작했습니다. 이명과 메니에르를 겪으면서 언제, 어떻게 어지럼증이 올지 모른다는 공포는 불안감을 불러왔고, 불안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났어요. 어떻게든 빨리 나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안정과 고요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안부 인사가 길어졌네. 오늘의 시는 백석, 정지용, 윤동주에서 거슬러 올라와 허은실 시인의 근작 시를 소개해보려고요. 사진, 인터뷰, 시가 수록된 책인데요. 고현주, 허은실의 기억의 목소리(문학동네, 2021)입니다. 부제는 '사물에 스민 제주 4.3 이야기'이고요. 고현주 사진작가가 4.3의 유족과 희생자분들의 유품카메라에 담고, 허은실 시인은 그분들의 사연을 옮기고, 시를 썼습니다. 품고 있는 의미만큼 만듦새도 고운 책입니다. 동백꽃들 가운데 작은 저고리를 찍은 사진이 새하얀 표지를 덮고 있어요. 



 (···)


 찔린 자리 총구마다

 꽃으로 막아

 동백은 이리 붉었다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동쪽 푸른 꽃 줄게

 서쪽 흰 꽃을 줄게


 말굽에서도 꽃향기가 나는 사월이야


 꽃봉오리 열리듯

 살아오는 내 사람아*



 - 허은실 「꽃 찾으러」  일부



첫 번째 시를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책을 오래 붙잡게 되겠구나, 페이지를 쉬이 넘기기 어렵겠구나, 하고 말이죠.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 이념 갈등이 시초가 되어 제주도민들이 수년간 겪어야 했던 잔혹하고 비통한 역사가 시로 태어났습니다. '찔린 자리 총구''꽃'으로 막아 붉어진 '동백'을 떠올리면 슬픔은 어느새 찬란해집니다. '꽃향기가 나는 사월'이 되면  '꽃봉오리 열리듯 살아오는 내 사람'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강은택 아버지의 저고리와 진아영 할머니의 이불 - 출처『기억의 목소리』(문학동네, 2021)





그저 막연했던 제주 4.3에 대해 알게 된 건 현기영 가의 순이 삼촌(창비, 1979)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였어요. 소설 속 화자에게 고향 제주는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을 상징하는 곳이자 '죽은 마을'인데요. 할아버지 제사를 위해 8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가깝게 지내던 순이 삼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순이 삼촌은 1949년 1월 소개령이 내려진 제주 북촌리 집단 학살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물인데요. 당시 뱃속에 있던 아이를 낳고 키우며 30년을 버텨냈지만, 그날의 총성이 남긴 상흔은 끝내 그녀의 삶을 앗아갔던 것이죠.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 현기영 『순이 삼촌』(창비, 1979) 중에서



소설은 피해 생존자들의 회상을 통해 제주에서 벌어진 참극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구체적인 인물의 목소리로 듣는 제주 4.3의 이야기는 역사에 박제된 과거가 아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고통이었어요. 현재에도 미래에도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생생한 '지금'이었어요. 1978년 9월 계간 문학지 <창작과 비평>에서 소설이 발표될 당시에도 정권은 가혹했다고 해요. 이후 현기영 작가는 군 정보기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고, 순이 삼촌』은 금서로 지정되면서 다시 어둠 속에 갇혀버렸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렴풋이 예상했음에도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건 사명감이나 용기가 아니라 운명이었다고 합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4.3을 겪은 작가 본인이 무고한 희생자들을 넋을 달래기 위한 일이었다고.


현기영 작가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4.3의 이야기를 쓰셨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4.3을 기념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기억하고, 염두에 두기 위해서라고 하셨지요. 비참하고 어리석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자꾸 꺼내서 말하는 것뿐이라고요. 허은실 시인의 시 역시 기억하기 위한, 잊지 않기 위한 하나의 애씀이겠지요. 4.3으로 아버지를 잃은 어느 소년은 이제 노인이 되었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4.3은 팩트나 배상, 보상의 문제보다 이 팩트를 어떻게 끌고 나가 역사에 남기느냐, 어떻게 이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을 달랠 거냐가 문제라고 생각해요._강중훈(1941년생)"


4월 16일, 또 다른 이유로 기억되어야 하는 날입니다. 4.3을 이야기하며 2014년 오늘을 기억하는 마음을 가만히 보탭니다.



제주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어쩌면 4.3 영령들의 피의 대가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주에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억의 목소리 작업은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 고현주 「봉인된 시간의 기억과 마주하다」,『기억의 목소리』(문학동네, 2021) 프롤로그 중에서



* 해당 시구를 글의 제목으로 인용했습니다.

** 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삼촌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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