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브런치무비패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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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본적으로 감독의 예술이기에 감독의 성향은 영화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유리정원>에서 읽히는 감독의 성향은 지독한 자의식 표출이다. 스토리텔러로서 이야기를 전할 때 그것을 보는 관객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고 자신이 할 이야기만 줄창한다.
문제는 그것이 엉성하고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고 재미도 없는데 심지어 2시간이 넘는다는 거다. 러닝타임 2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감독이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소재를 보여주면서 온갖 시간 낭비만 안했다면 1시간 30분의 러닝타임도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2시간이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버텨내도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을 파악하긴 힘들다. 난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보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을 보고 결과적으로 당신이 이 영화를 보지 않게된다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좋은 일 하나 정도는 한 게 되잖나? 그것으로 이 영화를 2시간 동안 버텨낸 내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의 긴 글을 읽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Watcha에 남긴 내 코멘트만 보셔도 된다.
1. 메세지 불분명
2. 일관성 없는 캐릭터
3. 개연성 없는 전개
4. 지루한 스토리텔링
5.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2017년에 본 영화 중 최악을 꼽으라면 1초의 고민도 없이 나는 <유리정원>을 꼽을 거다.
일관성 없는 캐릭터들의 향연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단연코 재연(문근영)이다. 필자가 재연을 주인공이라 말하는 이유는 포스터에 커다랗게 과학자 재연이 담겨있기 때문이고, 영화 내에서도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뿐이다. 재연은 주인공으로서 이렇다할 매력도 없고, 주인공으로서 그럴듯한 성과를 내지도 못한다. 주인공이 선한 역할인가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악한 역할인가 하면 또 애매하다. 즉, 일관성이 없다.(여러분은 이 글에서 하나같이 일관성이 없는 캐릭터들의 면면을 보게 될 것이다)
재연을 주인공으로 배당했다는 건 재연을 통해 감독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일텐데,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하는 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일단 그는 의식없는 생명체에 인체 실험을 한 비윤리적인 과학자이기에 지지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가 만들어낸 녹색 시약을 총 맞고 죽은 새에 주입하니 새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인다. 매드사이언티스트이긴한데 자연에게 도움을 주는 선한(?) 과학자다...?
과학자 재연에게 우호적인 정교수(서태화)도 일관성이 없긴 매한가지다. 걸음이 느린 재연에게 보폭을 맞추어주고 새를 사랑하는 섬세함까지 보이고, 흉하다 여길 수도 있는 재연의 발을 두고 전혀 징그럽지 않다며 영화에서 가장 섬세한 모습을 가지고 있던 정교수다. 그런데 학교에서 갑자기 흔하디 흔한 인간 중 하나가 된다. 실적에 매달리고, 재연을 두고 젊고 예쁜 대학원생과 바람을 핀다. 전에도 멀쩡히 있던 대학원생인데, 왜 이제서야 바람을 피는 지에 대해선 이렇다할 설명이 없다. 원래 바람둥이였던 거라면 영화 초반에 보였던 행위들은 다소 납득하기가 힘들어진다.
또다른 주인공 무명작가 지훈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지훈은 처음 보는 여자를 스토킹하기도 하고, 그의 공간에 들어가서 다이어리를 훔치오기도 한다. 주인공으로 쳐주기에는 누가 봐도 빻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 남자가 나중에 재연을 사랑하게 된다. 왜 그가 사랑에 빠졌는 지에 대한 설명은 조금도 없다. 김태훈의 영혼 없는 눈빛 연기는 당연히 전혀 도움이 안된다.
더 있다. 존경받는 원로 작가에게 물을 끼얹는 욱하는 성격을 보여줬던 그가 갑자기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있다. 경찰이 소설의 띠지에 박혀있는 "충격 실화"를 보고 수사를 시작한다는 것부터가 얼척이 없지만, 어쨋건, 그따위 하찮은 이유로 경찰이 부른다고 응하는 것부터가 영화 초반에 보였던 지훈의 캐릭터와 괴리감이 있다. 게다가 띠지의 "충격 실화"를 문제삼는 경찰에게도 완전 기죽은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도 앞에서 보였던 모습과 너무 다르다.
주인공이 아닌 인물은 좀 다를까? 아니다. 출판사 아재가 좀 일관적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돈에 미쳐있는 사람이고, 출판에만 도움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다. 출판 때문에 신고를 안하던 사람이 출판이 이루어지자마자 갑자기 정의의 사도가 되면서 신고를 한다. 돈만 밝히는 캐릭터를 생각한다면 차후작을 위해 신고를 하지 않는 것이 이 출판사 아재가 할 법한 행동이다. 신고 행위가 직접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지만 설령 마음이 바뀌어 신고를 했다면 왜 마음이 바뀌었는 지 영화로 설명을 해줬어야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일관적인 것은 감독이다. 일관적으로 불친절하다는 점에서.
개연성 없는 스토리 전개
일관성 없고 매력없는 캐릭터는 개연성 없는 스토리 전개 덕에 가능해진다. 말도 안되는 전개가 가능하다면 캐릭터가 일관성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캐릭터가 제멋대로 변주되면 되기 때문이다.
캐릭터에게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달리말하면 그 캐릭터를 어떤 상황에 던져두면 그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가령, 마블의 퍼니셔를 범죄 현장에 던져둔다면 그는 총을 쏴댈길거고, 배트맨을 던져두면 범죄자들을 죽이진 않겠지만 반불구로 만들 것이고, 셜록을 던져두면 복싱으로 그들을 제압할 것이다.
일관성 있는 뚜렷한 캐릭터가 성립됐다면 작가가 할 것은 그가 비범한 활동을 할 수 있게끔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리정원>의 신수원 감독은 말도 안되는 스토리 전개를 위해 캐릭터를 무차별하게 파괴한다. 스토리와 캐릭터가 전혀 연계가 안되니까 둘 모두가 망가지는 형세다.
작가 지훈이 문학 업계에서 따를 당하는 과정을 보면 감독이 시나리오 개발함에 있어 얼마나 업계에 대한 연구에 게을렀는지 알 수 있다. 자기가 그럴거라 생각하면 확인도 안해보고 시나리오에 쓴 느낌이다. 원로 작가가 무명 작가에게 "재능이 없으면 떠나라"라는 자극적인 말을 한다는것부터가 편파적이다.
거기에 더해 작가 지훈은 그 원로 작가에게 표절 의혹을 제기하면서 업계 왕따가 된다. 설명이 더 가관이다. 업계에선 다들 그 원로 작가가 표절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원로이기 때문에 쉬쉬했다는 거다. 즉, 신수원 감독이 그려내는 문학계는 원로 작가가 표절을 하면 문학계는 그것을 알면서도 쉬쉬하고, 그것에 문제제기하는 무명 작가를 왕따 시킨다. 그 와중에 언론도 무명 작가를 지켜주기는 커녕 왕따질에 합류한다. 이것은 문학계와 언론계에 대한 대단한 실례이면서 동시에 시나리오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현실로 와보면 나름 원로였던 신경숙 표절 논란 때만 하더라도 그를 지켜주려는 세력은 그리 거대하지 않았다. 표절 행위를 두둔하고 지켜주려는 '세력' 자체가 희미했다. 표절 저격수로 유명했던 그의 남편 정도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두둔했을 뿐이다. 언론도 원로라는 이유로 신경숙을 딱히 지켜주려하지 않았다.
신수원 감독이 묘사하는 과학계는 또 어떤가? '녹혈구'가 장기적으로 효용이 있지만 단기적으로 이렇다할 수익을 내지 못할 거라면서 무시하는 과학자들이 대부분인 것처럼 묘사된다. 자체적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획기적인 물건이 나왔는데 단지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과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대처한다니? 더 웃긴 건 그런 녹혈구를 소재로 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거다.
나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별로 흥미롭지 않은 소재를 담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은 영화 설정이 그렇다니 그냥 넘어가주고 싶기도 한데, 감독이 앞서 설득력 없이 묘사해놓은 문단과 과학계 등을 떠올려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는 대중마저도 제멋대로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연성 없는 스토리를 위해 온갖 주체들이 기이한 형태으로 변주되고 있는 거다.
한국 드라마에서 이런 식의 연출은 흔하디 흔하다. 변호사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선 기자를 쓰레기로 만들고, 기자가 드라마면 기자가 아닌 다른 주체들이 쓰레기로 등장한다. 여기서 퀴즈. 의사가 드라마면 누가 쓰레기가 될까? 병원장이나 환자들이나 간호사가 쓰레기가 된다. 한국 드라마 작가들은 스토리를 위해 특정 세력들을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을 해괴한 존재들로 만들어버린다. 혹자들은 말한다. 드라마는 어차피 픽션이니까 그래도 되는 거 아니냐고. 맞다. 그래도 된다. 금지하자는 게 아니다. 더 나은 연출 방식이 있다는 거다. 그런 식의 연출은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 내에서 현실과 괴리가 있는 장면이 뜰 때마다 우린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아니 시발 저게 말이 되냐곸ㅋㅋㅋ"란 말을 하면서.
장인들이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 때 고증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관객이 그 세계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를 위해 작가들은 업계의 동향을 연구하고 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연구하고 업계의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등 고증에 열과 성을 다한다. 미국의 앵간한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그 업계의 동향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영상물들을 보고 그런 식의 추측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앞에서 서술한 <유리정원>의 허접한 고증이 문제인 이유다.
그래서 <유리정원>은 무슨 말을 하려는건가?
알 수 없다. 핵심 소재인 나무가 자연을 상징하는 것 같긴한데, 거기에서 더 진행되지를 않는다. 재연이 기도하니 갑자기 교수를 죽여버리는 걸 보면 나무가 선한 존재는 아니다. 교수가 바람을 피고, 재연의 연구 성과를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았을지언정 그가 죽을 죄를 진 것은 아니잖나? 그렇다고 나무가 완전 나쁜 존재이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무를 통해 얻은 초록피(?)를 통해 새를 살려내는 걸 보면 자연 그 자체인 것도 같다. 자연의 엑기스를 맞은 교수가 썩어 문드러진 이유는 그가 자연과 섞이기엔 너무도 썩어빠진 인간이기 때문일 거다. 반대로 같은 걸 맞았는데 재연은 썩어빠지기보단 나무가 된 걸 보면 나무와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됐다. 나무는 자연이고, 재연도 그와 유사한 무엇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다. 뭐가 더 없다. 재연의 스토리를 통해 어떤 메세지를 얻어내기는 힘들다. 그럼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작가를 통해 어떤 메세지를 얻을 수 있을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한 여자를 미행하고 도촬하면서 소설을 쓴 인간한테서 무슨 메세지를 얻을 수 있겠나?
번외1. 빡치는 포인트
감독에게 빡치게 했던 장면 중 하나는 미행하던 작가에게 재연이 보이는 반응이다. 자신의 다이어리를 훔쳐갔고, 자신을 도촬하고 관찰하며 온갖 글을 써낸 사람한테 재연은 이렇다할 불쾌한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허락도 없이 자신을 다루며 글을 써냈는데 화를 내기는 커녕 "더 써주세요"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식으로 이 남자의 빻은 행위들은 당사자에 의해 용서된다.
이런 식으로 빻은 남성의 행위를 용서하는 식의 연출은 <패신저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남주는 단순히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한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영화 막판에 여성이 그를 용서함으로써 남주의 빻은 행위가 용서된다. 아니 씨발 나는 용서가 안되는데 왜 감독이 용서를 하고 지랄이냐고? 다시 <유리정원> 이야기를 해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이 남자는 나무가 된 재연 앞에서 정말 사랑했다는 식으로 눈물을 질질 짠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수원 감독은 이 남자가 정말 이 여자를 사랑했다는 식의 연출을 한다. 어이가 없다.
번외2. 환자 이미지가 강한 문근영에게 또 이런 역할을?
영화 외적인 이유이긴하지만, <유리정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안그래도 환자 이미지가 강하게 베여있는 문근영에게 상당히 위축되어있는 환자와 같은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문근영의 완치에 방점을 찍고 그 점을 시나리오 포인트로 삼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영화를 발판 삼아 그녀의 컴백을 더 힘찬 방식으로 알릴 수도 있으니까.
주체적인 환자였으면 또 모르겠다만 그렇지도 않다. 감독의 자의식 과잉이 반영된 영화라는 지점에서 리뷰 글을 풀었는데, 배우에 대한 배려 역시 보이지 않는다. 문근영도 본인이 이 배역을 선택한 것일테니 감독에게 모든 것을 덤터기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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