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현우 Dec 31. 2017

<원더>: '다름'을 연출하는 문제

<신과함께>와 비교를 중심으로


#브런치무비패스 #감사

#원더 #신과함께 #스포일러주의


장애와 다름

이 글의 제목은 [<원더>: '다름'을 연출하는 문제]다.'다름' 대신에 '장애'라는 단어도 고려했지만 결국 다름을 선택했다. <원더> 속 주인공은 전혀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얼굴이 남들과 다를 뿐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는 전혀 결격사유가 없다. 그의 사회생활을 힘들게 하는 건 그를 보는 시선이지 그의 남다른 얼굴이 아니다. 영화 속 교장은 이렇게 말한다. "어기(주인공)는 얼굴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최근 개봉한 <신과함께>에서는 입으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입으로 말을 못한다 뿐이지, 수화를 통한 언어 소통을 하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김용화 감독은 이 인물의 역할명을 '자홍모'로 정했다. 즉, 그에겐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는 자홍의 어머니는 영화 속에서 그저 모성애를 보여주는 인물로서 소모되며 관객은 김용화의 의도에 따라 자홍모를 불쌍히 여기게 된다. 우리는 그를 한 명의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불쌍한 '장애인'으로 보며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원더>가 남다른 얼굴을 가진 어기를 다루는 태도와 <신과함께>의 김용화 감독이 말을 못하는 자홍모를 다루는 태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원더>는 어기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다루면서 그를 우리와 다르지 않은 혹은 우리보다 더 비범한 존재로 그리는 반면, <신과함께>는 자홍모의 이름을 앗아가는 것을 넘어, 둘 있던 자식까지 빼앗아가면서 그를 더 없이 불쌍한 존재로 만든다. 


<원더>의 어기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떠나는 꿈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과학 지식에 관해서는 또래를 압살하지만, <신과함께>의 자홍모는 말도 못하는 데, 돈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그저 불쌍하기만 하다. 자홍모는 삶에 대한 아무런 의지도 욕망도 없다. 그저 '모'다. 


그리고 이 불쌍한 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김용화 감독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배우를 섭외한다. 그보다 적은 비중으로 출연하는 법관으로는 김혜숙을 섭외하면서 말이지.


주인공의 엄마

<원더>는 꽤나 흥미로운 플롯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주인공 어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다음에는 그의 누나 비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이런식으로 관점이 바뀌면서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들의 삶이 모두 다뤄진다. 


태어났을 때부터 남다른 얼굴을 가졌기에 부모들은 비아가 아닌 어기에게만 많은 관심을 줬고 비아는 자연스레 소외됐다. 해서, 영화는 비아의 삶 역시 어기의 삶만큼이나 심도있게 다룬다. '그런 동생'을 가진 누나는 어떤 삶을 사는 지를 다루는 것도 '그런 동생'의 삶을 다루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더>는 비단 어기의 누나에게만 관심을 주는데서 영화를 끝내지 않는다. 어기의 엄마는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이자벨이라는 캐릭터인데, 이자벨의 놀라운 점은 그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롤이 "어기의 엄마"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만해). 


<신과함께>의 자홍모를 언급하면서 그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욕망도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자벨은 다르다. 이자벨은 그림을 잘 그리고, 삽화작가가 꿈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미완성된 논문이 있다. 어기가 태어나면서 그의 꿈은 나중으로 미뤄진다. 하지만 결국 그는 논문을 완성한다. 어기가 집 바깥에서 결국 적응하는 것에 성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자벨도 나름의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즉, 이 영화에서 누군가의 감정을 자극시키기 위해 객체로 존재하는 인물은 찾을 수 없다. <신과함께>에서처럼 장애인을 연민이나 동정심을 자극하는 도구로 소비하지 않고, 엄마 역시 오로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불쌍한 존재로 이름도 없이 그려내지 않는다.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감독은 그들에게도 생명을 주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다. 


<원더>와 <신과함께>가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

<원더>는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자-어기가 어떻게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지를 따스한 터치로 보여준다. 어기는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직접 구원하는 데 성공한다. 어기가 타인의 도움만으로 학교에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를 존경할 이유는 사실 없다. 하지만 그는 때론 도망쳤을지언정 꾸준히 학교에 등교했고, 배신을 당했을지라도 다시 사람을 믿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딪혔고 결국 학교에서 그를 지지해줄 친구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어기가 망치로 편견의 벽을 깨부수려할 때 그와 연대한 많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테니까. 결국 어기는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과 응원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을 직접 구원해낸다. <원더>의 감동은 이 지점에서 은은하게 퍼져나온다. 다름을 수용하는 따뜻한 개인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를 통해서.


한편, <신과함께>은 관객의 죄책감-불효 경험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유도한다. 감독은 주인공과 동생을 불효자로 포지션 시킨 후 그들에게 아낌없이 내리사랑하는 어머니를 보여준다. 불효했던 자식은 과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를 지켜보는 구경꾼들 역시 공감력이 너무나도 철철 넘쳐서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신과함께>에서 감정이 가장 폭발적으로 터지는 장면이다. 그래서 설령 이 트릭에 넘어가 눈물을 훔치더라도 찝찝한 감정이 남는다. 기분 좋은 감정으로 폭발하는 눈물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신과함께>는 부모의 내리 사랑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 영화는 이 시대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했던 희생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부모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는 것, 영화의 가장 중요한 파트를 담당하는 역임에도 영화 포스터에서는 정작 머리털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저 부모를 눈물 자극 포인트로 소비하고 팽할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애초에 부모 팔아 장사할거였으면 포스터에 얼굴이라도 하나 박아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은데, 정작 포스터에서는 배우들이 액션 블록버스터인양 똥폼을 잡고 있으니 헷갈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포스터의 문구도 재밌다."아무도 본 적 없는 세계"라니. 윤제균이 존나 자주 보여준 세계가 또 한 번 열렸을 뿐인데.

-

포스터 두 개를 같이 올려볼테니 비교해보시라. 글은 여기서 끝난다.

-


-

콘텐츠 소비에 대한 자발적 후불제 원고료를 지불해주세요.

1인 창작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현금 후원- 카카오뱅크 3333-03-5528372 박현우

페이팔 정기 후원(언제든 해지 가능)

스타벅스 커피 기프티콘을 받기도 합니다. 카카오톡- funder200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