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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Jan 28. 2018

<제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제도의 근거로서의 제도

내용과 무관하게 나는 이 책을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않을 생각이다. 번역이 최악이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얼마든지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다. 이 정도로 번역이 안습이었던 책은 또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번역 때문에 집어던지고 싶었던 또다른 책은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문장력 없이 외국어만 아는 사람들한테는 번역의 기회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번역은 안습이지만 책의 내용은 흥미롭다. 일단,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변화하고 또 사라지는 지 다양한 학자들의 의견을 읽어볼 수 있다. 학자들의 의견은 작가가 자신의 의견을 보충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것인데, 굳이 그런 의도를 제외하더라도 '이런 논의가 있었구나'하면서 읽어보면 제도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소화할 수 있을 거다.


작가-캐쓸린 씰렌은 제도가 중첩되거나 전환된다고 주장한다. 기존 제도와 유사한 무엇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제도간 갈등이 발생해 하나의 제도가 완성되거나, 집단 간의 세력 다툼의 결과로 제도가 철폐되거나 설계된다는 식이다. 그 근거로 독일의 제도를 든다.


작가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제도는 독일의 제도 중에서도 독일의 숙련공 제도다. 1880년대의 독일의 마스터, 즉 장인은 도제를 두고 착취했다. 도제는 장인에게 부여받은 일을 무료로 하며 가르침(?)을 받았고, 때로는 강습료를 주기도 했다. 2018년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한국 예술업계의 열정페이를 떠올리면 된다. 영화, 사진, 미술업계에는 여전히 이런 착취형 도제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독일의 이 착취 구조가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수공업회의소라는 조직에게 막대한 권한이 생기면서부터다. 수공업회의소는 1897년부터 장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도제들에게 시험을 보게 했고, 도제가 만약 그 시험에서 떨어지면 장인이 도제들에게 제대로 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 도제를 키울 수 없게끔 만들었다. 자격 심사를 한 것이다. 장인들 입장에서는 도제를 제대로 훈련시키지 않으면 노동력을 잃게 되는 상황이니 훈련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흥미롭게 봐야할 지점은 따로 있다. 독일이 수많은 제도 옵션들을 다 제쳐두고 굳이 장인 시스템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 독일은 도제 시스템을 완전히 배제하고 다른 종류의 사업 방식에 푸쉬를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존의 제도를 해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 수공업 도제 자격 시험이 도입되자 비슷한 종류의 자격시험을 만들려는 사회적 압박이 드세졌고, 그 압박의 결과로 새로운 제도들이 생기기도 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중첩이나 전환이라는 개념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장인-도제 시스템이 지배적이었던 독일 사회에서 장인-도제 시스템이 아닌 무엇을 도입하는 것은 비용이 발생한다. 일단 상인들에게 이미 너무도 익숙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너무 과격한 변화를 주면 그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한다.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락자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제도는 제도에 기반하여 설계된다. 중첩이다. 장인에게 자격을 주는 시험이 생기자 비슷한 종류의 자격 시험을 요구하는 집단들이 늘어나며 새로운 제도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생겨난 제도들은 그 제도를 보완하는 새로운 제도들로 확대되었다.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번역 문제 때문에 내가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다. 다만 내가 그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결국 법이나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 만들어져있는 제도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그 제도에 의지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이해관계자들의 압박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에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제도로는'전안법'을 들 수 있을텐데, 이해 당사자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 분노는 최근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고. 청원 때문은 아니지만 전안법이 이슈가 된 뒤부터 당사자들의 분노는 국회에까지 가닿았고, 결국 지금은 개정 수순을 밟고 있다.


애초에 전안법이 발의된 것에서도 '또다른 당사자들'의 입김을 읽을 수 있다. 문제되었던 전안법이 도입되면 영세하게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도소매로 옷을 판매하는 분들의 비용이 대폭적으로 상승한다. 대부분의 물건들에 KC인증을 받아야하는데, 그게 다 비용이기 때문이다. 마진률이 급격하게 떨어질 것은 분명하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탈락하는 업자들도 늘어나게 될 거다. 결과적으로 KC인증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대기업들에게만 좋은 제도인 것. 전안법은 2015년에 정부가 발의한 법인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속해있던 새누리당이 대기업들의 서포트를 받는 정당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서모임에서 다루면 좋을 듯한 질문들

1. 제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2. 기존의 제도와 무관한 제도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3. 제도를 변화시키는 변수는 또 무엇이 있을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 변수는 의미있을 정도로 강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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