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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Sep 03. 2019

허브에세이 - 모란

저는 사실 고스톱보단 포커가 좋습니다.

‘쓰잘데기 없이 또 김지미가 와부렸어 형님 가지셩/ 육목단 열끝을 삼촌은 늘 김지미라 불렀다/ 어느 날 궁금해서 물었더니/ 예쁘면 뭐하냐 그림의 떡인데 써먹을 데가 없는걸/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화투판에서 육목단 열끝이 된 사연인지라.’


박제영의 시 <모란>의 도입부다. 시인도 어려서부터 화투를 즐겨 친 모양이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 이미 외할머니께 민화투를 배웠고, 아버지께 고스톱을 배웠다. 그렇게 조기교육을 받아놓고도 여태 유월이 장미인 줄 오해하다가,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야 알게 되었다. 유월은 모란임을.


모란을 한자로는 ‘수컷 모(牡)’ 자에 ‘붉을 단(丹)’ 자를 써서 모단이라고도 하고, ‘칠 목(牧)’ 자에 붉을 단 자를 써서 목단이라고도 한다. 모단이 맞는지, 아니면 목단이 맞는지, 모단이든 목단이든 왜 우리말로는 모란이라 읽는지, 말의 어원과 음운이 변화하는 원리는 내가 다 알기 어렵다. 그러나 육 열끗이 김지미로 불린 사연은 짐작이 간다. 패에 그려진 모란꽃은 몹시 화려하지만, 고스톱에서는 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은 별 볼 일 없더라도 세 장을 모으면 고도리가 나는 이·사·팔월의 열끗이나, 여차하면 쌍피로 쓸 수 있는 구 열끗과 대조적이다. 절대적 미모로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면서도 전통적 여성상은 거리낌없이 벗어던졌던 김지미씨가 당시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육 열끗처럼 보였으리라.


육목단 열끗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어, 모란만 그려진 껍데기와 구분이 된다. 여기서 잠깐 선덕여왕의 일화를 되짚어보자. 선덕여왕이 아직 덕만공주이던 시절, 당 태종이 꽃씨와 함께 모란 그림을 선물로 보냈다. 그림을 본 공주는 “이 꽃은 필히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를 심어 꽃을 피우니 과연 그러했다. 어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느냐고 묻자 공주는 “꽃을 그리며 나비를 그리지 않았으니 향기가 없지 않겠는가. 이는 내가 짝이 없는 것을 두고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 일화는 여왕의 지혜로움을 칭송하기 위해 전승된 것으로, 실제 모란에는 향기가 있다. 중국에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전통이 있었을 뿐, 당 태종은 여왕을 희롱할 의도가 없었다. 화투는 일본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모란 옆에 나비가 그려져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모란의 뿌리껍질을 약으로 쓴다. 목단피(牧丹皮)라는 약재다. 본초학적으로 목단피는 청열양혈약(淸熱凉血藥)에 속한다. 열을 끄면서 피를 식히는 약이다. 혈액순환을 돕고 어혈을 친다. <동의보감>에는 목단피에 대해 ‘월경이 나오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고 나온다. 좋은 처방에 두루 들어가 있어 한의원에서 자주 쓰인다. 그러나 목단피는 식품으로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무난한 약재가 아니니 반드시 한의사의 처방을 받아 복용해야 한다.


육목단의 열끗은 영 쓸모가 없지만, 껍데기는 다른 월의 껍데기와 모여 점수에 기여할 때가 많다. 보잘것없는 껍데기가 오히려 유용하다는 점에서도 육목단은 모란꽃을 닮았다. 다음에 화투를 치면 이 이야기를 풀어야겠다.


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905241650141&code=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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