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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Sep 03. 2019

태국 여행기 1일 차

2019.7.9.


삼춘 저 여행 다녀올게유. / 지금? 어디루. / 태국으루유. / 아이구 왜 볼 것두 없는 동남아를 가. / 그냥 쉬러 가는 거쥬 뭐. / 그려 언제 오냐. / 이번 주 말고 그다음 주 일요일유. / 어우 엄청 오래 있다 오네. / 예. / 그려 잘 다녀와라. / 네. 삼춘.


숙부님께 여행 간다 말씀드리기가 약간 민망했다. 또 여행이라니. 9개월째 놀고 있으면서도 몸은 휴식을 바라, 같이 태국 가자는 희형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래. 갈 수 있을 때 다녀와야지. 처음엔 일주일쯤 방콕 다녀올까 했는데, 태국 현지인처럼 생긴 동생, 양작의 이야기를 듣고 방콕보단 빠이에서 머물다 오기로 정했다. 기간도 2주로 늘렸는데 티켓팅을 잘 못하여 12박 13일이 되었다. 어쨌든 짧지 않다.


오후 세 시. 망우역 앞 정류소에 희형은 먼저 나와 있었다. 함께 공항버스 탑승. 비용은 14,000원. 좌석이 넓어 편했다. 희형과 각자의 지난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각자 다녀온 곳 중에 캄보디아 씨엠립이 겹쳤다.

네 시 사십오 분. 공항 도착. 공항은 한가했다. "야. 공항에 오니 벌써 신이 난다." 내가 2년 전 곽에게 했던 말과 똑같다. 희형은 자유여행이 처음이란다. "형. 저도 그랬었는데, 자주 오니까 이젠 별로 안 설레요." 재작년 곽이 이런 마음이었구나.


자주 왔다지만 그동안은 주로 따르는 입장이었다. 이번엔 내가 희형을 이끌어야 한다. 환전을 하고, 티켓을 받고, 태국 심카드를 미리 사고, 여행기간 동안의 휴대폰 일시정지를 신청했다. 둘 다 짐이 작으니 들고 탔다가 내릴 때 빨리 이동하기로 합의했는데, 보안검색대에서 나는 치약과 선크림이, 희형은 치약과 샴푸가 걸렸다. 100ml가 넘어서. 결국 다 버렸다. 아깝다. 이것들이 액체류란 생각을 왜 미처 못했을까?
"아. 그 샴푸 비싼 건데. 이만 원도 넘는 건데."
"뭔 샴푸가 그리 비싸요?"
"닥터 그루트라고, 탈모에 좋아서 그 걸로만 감는단 말야. 다른 샴푸로 감기 싫어서 싸왔는데. 아오 아까워."
희형은 머리숱이 풍성하다. 다른 샴푸를 써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위로와 공감을 같이 시전했다.
"잊어요. 형. 잊어. 설마 다른 샴푸 쓴다고 금방 머리 빠지겠어? 아오. 나도 썬크림 좋은 건데 그거. 알로에 들어간 건데."


밥 때다. 안타깝게도 희형은 PP카드를 갖고 있지 않아서, 우리는 마티나라운지에 가지 않았다. 푸드코트를 두리번거리다 로봇김밥에 갔다. 김밥 두 줄과 떡볶이를 먹었다. 형은 쏘겠다 했으나, 나는 그러는 거 아니라며 반액을 송금해 드렸다. 형은 카카오페이를 몰랐다. 계좌 연동을 도와드리고 사용법을 알려드렸다. 
"아니 어떻게 형 아직도 카카오페이를 안 쓰고 계셨어요." 
"그러게. 주변에 쓰는 사람이 없어. 나이들 수록 새로운 거 배우기가 어렵다니까."
희형이 벌써 그런 나이인가. 나보다 일곱 살 밖에 안 많은데.

면세점 쇼핑도 라운지 이용도 하지 않으니 탑승까지 시간이 넘쳐흘렀다. 한가한 공항에서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께 전화해서 여행을 떠나므로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거라는 말씀을 드렸다. 여행도 좋지만 장가를 가야 된다셔서, 요즘 이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냐고 답했다.


탑승. 뉴욕 다녀올 때 타본 2층짜리 큰 비행기다. 우리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둘 다 통로 측에 앉았다. 장시간 비행의 불편했던 경험을 떠올려 그렇게 자리를 잡았는데, 출발할 때 보니 심지어 각자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오,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완전 개꿀. 희 형은 좌석 디스플레이를 신기해했다. 재작년의 나와 똑같이. "이것 봐. 최신 영화도 있어!" 소박한 품성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즐겁게 한다.

이륙하자마자 밥이 나왔다. 이렇게 일찍 나올 줄 알았다면 저녁을 덜 먹었을 텐데. 해산물 밥을 골랐더니 생선 밥이 나왔다. 익숙지 않은 맛이었으나 나쁘지 않았다. 하긴, 태국 음식 다들 괜찮다 했지.

좌석 디스플레이로 영화 <증인>을 보았다. (이하 약 스포) 정우성이 마흔여섯 노총각으로 나왔다. 그래. 정우성은 실제로도 노총각이잖아? 이제 저런 사람도 노총각으로 사는 시대야. 장가를 안 가는 거지, 못 가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영화를 보았는데, 보다 보니 영화 속 정우성은 장가를 안 가는 이유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김향기의 연기가 아주 좋았다. 여러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5년 전 <봄날의 라이브> 때 알게 된 박찬영 선생님도 나왔다. 영화에서 뵐 때마다 반갑다. 다만 스토리 구조는 영화 속에서 언급된 퍼즐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단순해서, 예상을 깨는 전개에서 오는 즐거움은 없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좋았다.


뉴욕을 다녀온 뒤여서인지 방콕까지의 비행은 찰나로 느껴졌다. 잠 한숨을 안 잤는데 벌써 다 오다니. 입국서류를 작성하고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착륙. 설렌다. 들뜬다. 공항에 들어서니 묘한 냄새가 난다. 희형은 '사우나 냄새'라 했다. 나는 '타이 마사지 냄새'라 했다. 분명 맡아본 냄샌데. 유칼립투스인가?

입국은 순조로웠다. 호텔로 이동할 차례. '호텔까지 택시요금을 기사는 500을 제시할 텐데, 450으로 협상 가능할 것'이라는 양작의 디테일한 조언에 따라, 잔돈을 만들려고 일부러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 물가는 별로 싸지 않았다. 심지어 맥주는 한국이 더 싸다. 우리나라 좋은나라. 잔돈을 들고 택시를 타러 가 호텔 위치를 보여주니 350밧 달란다. 뭐야 양작. 완전 어긋나잖아. 양작 신뢰도 -1. 달라는 대로 주기로 하고 택시에 탔다.

보스 스위트 호텔 도착. 미리 얘기한 덕인지 12시가 넘었지만 체크인이 가능했다. 나는 206, 형은 208호. 각자 편하게 하나씩 쓰기로. 방은 넓지만 좀 지저분했다. 담배 쩐내가 구석구석 배어 있고 심지어 바퀴벌레도 보였다. 아. 너무 싼 데로 왔나.

대충 짐 챙겨 다시 나왔다. 수많은 여자와 레이디보이가 우리에게 손짓하고 말을 걸었다. 어떤 술집은 아예 여자들이 줄지어 앉아 손님을 받고 있었다. 아니, 여자인지 레이디보이인지 멀리서 봐서는 감이 오지 않았다. 가까이서 목소리를 들으면 비로소 알았다. 잠깐 사이에 평생 본 것보다 많은 수의 레이디보이를 보았다. 여기가 태국이구나.

걷다 보니 나나플라자라는 곳이 나왔다. The worlds largest adult playground. 오. 그렇담 가봐야지. 들어가기 전 셀카를 찍었는데, 옆에 있던 가드가 안에 들어가서는 사진 못 찍는다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가보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한 바퀴 돌아 레인보우 4에 들어갔다. 작은 맥주 한 병에 165밧. 자리에 앉아 한 병씩 마셨다. 무대 위의 여자들은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이들은 어떤 삶을 꿈꾸며 살고 있을까.

두 시가 되자 나나플라자의 모든 점포가 약속한 듯이 문을 닫았다. 맥주가 아쉬웠으므로, 밖으로 나와 한잔 더 하러 갔다. 힐러리 1. 싱하 생맥주 1 파인트에 170밧으로 싸지 않았다. 새우와 계란으로 만든 요리를 안주로 시켰는데 그건 쌌다. 140밧. 둘이 맥주를 마시는데 저 건너 테이블에 앉은 서양인 여자들이 자꾸 이쪽을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면 윙크도 한다. 사십 년 인생 경험에, 여자가 순수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음을 알기에 눈길을 피했는데, 급기야 한 명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병을 부딪히며 말을 건넸다.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 묻더니,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란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예쁘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성을 부여잡고 무관심을 표했다. 자리에 돌아간 여자 일행은 얼마 안 되어 떠났다. 희형은 못내 아쉬워했다.

야. 쟤들이 우리를 정말 마음에 들어했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 형. 그런 일은 우리에겐 있을 수가 없어요. / 아니 임마. 단 1%라도 말야. 여기 외국이잖아. / 하긴. 여긴 우리가 모르니까. 그래도 1%는 너무 높고, 한 0.01%로 합시다. / 그래. 그러니까 더 얘기해볼걸. / 그래요. 혹시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하면, 그땐 무슨 목적인지 물어나 보죠 뭐.


맥주를 하나 더 마시고 숙소에 들어왔다. 새벽 네 시. 얼마나 저렴한 호텔인지, 어메니티에 칫솔 치약이 없어서 가져온 칫솔로 치약 없이 이를 닦았다. 눕자마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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