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위험해보이는 퇴폐적 섹시미
존 레논의 오노 요코,
앤디 워홀의 에디 세즈윅. 그리고 밥 딜런.
폴 매카트니의 린다 매카트니.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
이들을 보며 난 어느 사이엔가 누군가의 뮤즈가 되길 은연 중에 바라왔던 것 같다.
누군가의 뮤즈로 산다는 것,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어느 형체로든 그려진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벅차오르는 일인가.
사람은 교감한다. 서로 주고 받는 에너지와 영향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창조물, 또한 그런 가능성이 더욱 더 큰 폭으로 열리는 건 내가 가지지 못한,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옆 사람에게 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투영한 나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
영화 <팩토리 걸>을 보며 앤디워홀의 뮤즈였지만 결국 버림받아 망가져가는 에디의 삶을 보건대, 사실은 누군가의 뮤즈로 사는 일은 그렇게 달콤한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래도 위험해보이는 아름다움에 끌리고, 금지된 것에 손을 대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게 어찌 보면 내가 퇴폐미에 열광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뮤즈는 위험해보이면서도 아름답다.
누군가의 영감이자, 그 영혼이 깃든 작품.
끝까지 아름답다면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르니, 위험한 것은 만지지 않은 채로 놔두는 게 더 탐이 나겠지.
불안정과 불완전함에서 오는 그 아슬아슬함 말이다.
내가 연예인과의 연애를 막연히 꿈꾸거나, 음악하는 사람, 혹은 미술, 예술계에 있는 사람에게 끌리던 건 아무래도 그런 은연 중의 동경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만큼 다재다능해지려 노력하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나를 표출할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했었다.
누구나 매력적인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걸 알고 표현하고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본인의 장점을 부각하는 방법을 모르고, 자신을 표현해내는 게 서투른 사람일 것이다.
보여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건 비단 보여지는 옷, 신발, 악세사리, 머리 등의 겉모습뿐 아니라, 목소리, 말투, 지성의 정도 등의 것도 모두 포함된다. 일반인이기 때문에 모니터링을 하거나 고쳐줄만한 독설가나 프로듀서가 없을 뿐, 모든 사람은 그렇게 본인을 가꾸고, 어떻게 남에게 보일지에 대해 고민한다. 자기만족에 대한 부분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남과 부대끼며 사는 사회적 동물의 기본적 성향인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도 서로 그렇게 잘 보이려 깃털 하나도 꾸미는데, 사람이라고 그렇지 않을쏘냐. 치장의 역사도, 철학이나 연극만큼이나 오랜 역사일텐데.
사실은 그러면서도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늘 되뇐다. 나는 참 다른 사람을 신경쓰고,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면서도, 어느 순간보면 그런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인 척 하기도 한다.
주목받고자 하는 마음
혹은
주목받고 싶지 않은 마음.
특별하고 싶지만 독특하고 싶지는 않은,
그 한 끝 차이.
뮤즈가 된다면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를 생각하기보다도 그 사람이 나를 보는 모습을 그려낼테니, 그를 통한 나를 오히려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때가 된다면 그런 색채를 입는 나는, 나라는 관객에게 낯설까, 아니면 오히려 익숙할까.
눈을 깜빡, 감았다 뜬다.
주변이 캄캄하다.
눈을 떠도 감아도 칠흙같이 어둡다.
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자꾸 하는 걸까.
다시 눈을 감는다.
달콤한 꿈이라도 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