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해석
그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 앉는 법, 하는 행동,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되었을 의미 등을 꿰뚫어보는 것마냥 뻔하게, 그리고 직관적으로 써내려진 글. 그 글을 읽어보노라니 누군가 사람을 보는 시선에서 만들어지는 글들이 얼마나 관능적일 수 있는지 보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당신의 글을 만나 그 상황과 말들이 뼈가 굳고 숨이 자잘자잘 붙더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들을 했다. 그는 내 담백한 글써내기 방식이 좋았다고 했지만, 난 내가 잘 알 듯 어떤 방식으로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있는 내 방식이 좋지만은 않았다. 허세와 자조, 그리고 체념과 냉소가 나열된 내 글이.
느낌과 방식은 다르지만 관찰에서 오는 오해, 그 진실이 왜곡된 순간들을 경험하는 순간은 꽤 아찔하다. 남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내 생각과는 다른 상황을 자주 만난다. 내 목소리를 녹음해 들었을 때 생소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되듯, 그게 나에게 큰 실망감이나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것과 같이, 어디선가 쓰여진 내 글을 주워서 읽게 되면 그런 기분이 든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휘갈겨진 그 글의 해석이 그럴 싸 해진다면, 조금은 기분이 좋은 일일까.
누군가에 무엇을 보여주는 것은 그에 대한 의견을 듣기로 맘먹거나 결정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날 내어놓는 것을 뜻한다. 비평이나 평가를 듣는 것이 두려워 말하지 않기로 했다면, 홀로 '대화'없는 삶을 살기로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 선택은 그랬다. 어느 순간 말하지 않기로, 결정을 미루고 물러서기로. 누군가에게서 그어지는 선과 잣대가, 나를 향한 평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리 하던 버릇은 급기야 어느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없는 상태에까지 가게 했다. 여전히 내 가치판단에 대해서 나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눈치보고, 더 표현할 수 있을 장소와 시간을 골라서 그 자리에 내가 서있을 수 있도록, 무언가 해볼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스스로를 채근한다. 그래도 시계는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간다.
'아직도 왜 어렵지'라는 문제에 봉착하는 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처음 맞이할 '나의 문제'에는 늘 서투르다.
섬세하지 못한 내 글쓰기는 결국은 야한 글에 접점을 대기에는 한참을 떨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정을 미루고, 당장을 살기 버거우니.
그래서 결국 결론은 그 자리에.
그래서 지금이 떠날 시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