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길 위에서

지리산 그녀라 불리다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 지리산 그녀라 불리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세석까지,
거리로는 약 20km.
결코 짧지 않은 길이다.
게다가 비 소식이 있었다.
오전만 내린다던 비는
결국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비가 내리면 산행은 더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래, 비 맞지 뭐.”
그렇게 마음을 놓으니
길이 오히려 부드러워졌다.

첫 우중산행은 힘든 기억으로 남았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괜찮았다.
산은 그대로인데,
달라진 건 내 마음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산악회 팀들도 꽤 있었다.
비 덕분에,
대피소 예약이 가능했다는 사실에
괜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비가 취소를 만들고,
그 취소가 내게 자리를 만들어준 셈이다.

연화천으로 향하는 길은
계속 추웠다.
대피소에 도착하자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그때였다.
옆자리 산악회 팀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끓이고 있었다.

“수제비예요. 같이 드세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비에 젖은 몸으로 앉아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을 들었다.
그 한입이 몸과 마음을 동시에 녹였다.

낯선 이들의 호의가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그 순간, 나도 무언가 나누고 싶어졌다.


“이거 받으세요.”
나는 가방 속에서 라면 봉지를 꺼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넸다.

여성 회원들에게는
유산균 두 봉지를 나누어 주었다.

내가 가진 건 크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나누고 싶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 순간 알았다.
나눔이란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라는 걸.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웃음은 더 따뜻했다.
서로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챙기며
함께 걷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 팀의 리더가 말했다.
“이제부터 지리산 그녀라고 불러드릴게요.”
뜻밖의 별명에 웃음이 났다.


혼자이기에,
이번에도 사진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리더가
회원들 사진을 찍어주면서
내게도 말했다.
“자, 여기요. 한 장 찍어드릴게요.”

찰칵—
비 오는 날, 사진을 찍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알기에
그 한 장이 참 고마웠다.
이렇게 또 도움을 받는다.



함께 걷던 다섯 명의 동행,
여성 두 분, 남성 세 분.
서울에 산다고 했다.
사는 구는 다르지만
오랜 세월 함께 산을 다니는 사이 같았다.

그들의 발걸음에서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보였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비에 젖은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손길이 참 따뜻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100대 명산을 함께 도전했던
내 보석 같은 친구들이 떠올랐다.
“우리도 저렇게 걸었지…”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다음에는 꼭, 함께 오자.’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세석에 도착하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대피소 안에서는 또 다른 나눔이 이어졌다.
그들은 어묵탕을 꺼내 함께 나누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제가 나눌게요.”

그 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밤이 깊어질 무렵,
빗소리가 대피소 지붕을 두드렸다.
낯선 이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흘렀다.

그제야 알았다.
산행은 기록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비 내리던 그날,

나는 지리산에서 사람의 온기를 배웠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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