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의 빛 아래서

운무 속에서 다시 길을 찾다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장터목 대피소를 떠나려는데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천왕봉이 저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안개가 나를 막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가자.”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길은 여전히 미끄러웠다.

비에 젖은 흙과 돌들이

발끝을 붙잡았다 놓았다.


하늘은 흐렸지만,

멀리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숨이 차올랐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웠지만

그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두려움이 아닌 기대가

나를 밀어주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어둠 속에서 올랐던 길이라

보지 못했던 풍경들.

이번에는 제석봉 너머,

그 길이 보고 싶어서 새벽 일출을 포기했다.


생각보다 그 길은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다.

시간은 바쁜데,

내 마음은 느릿하게 흐른다.


문득 다른 계절이 궁금해졌다.

야생화가 피어나는 봄,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의 이곳은

또 어떤 얼굴일까.


“거의 다 왔어요.”

천왕봉을 오르던 낯선 이가 말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몇 걸음, 또 몇 걸음.

그리고 마침내,

눈앞이 탁 트였다.


천왕봉.

드디어 도착했다.


해는 구름에 가려 있었지만

빛은 분명히 있었다.

안개가 일렁이고,

그 틈새로 희미한 햇살이 번졌다.


누군가 말했다.

“이게 천왕봉의 운무예요. 오늘 운이 좋네요.”


맞다.

일출은 놓쳤지만,

운무는 놓치지 않았다.


빛이 구름 사이로 쏟아지며

산의 능선을 천천히 물들였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그저 조용히 숨을 골랐다.

눈물이 났다.


생각해보면,

이 길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오르막은 늘 힘들었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선물이 있었다.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누군가의 도움 덕분이기도,

수많은 ‘나’의 다짐 덕분이기도 했다.


천왕봉의 바람이 말했다.

“잘 왔어요.”


그 한마디가

모든 피로를 덮었다.


잠시 뒤,

조용히 내려앉은 운무를 바라봤다.

그 속에서 천천히 길이 열렸다.

빛이 구름을 뚫고

산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알았다.

지리산의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언제나 찾아온다는 것을.


산의 빛은 기다림 끝에 온다.

그리고 그 빛은,

나를 비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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