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봉정암의 숨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산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엔 숨처럼 따뜻한 기도가 있었다.

그곳에선 바람조차 말을 아끼는 듯했다.


봉정암에서 미역국과 주먹밥을 야무지게 먹었다.
따뜻한 국물 한 모금이 온몸에 스며들자
지친 다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남편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부처님께 인사는 드려야지.”
하며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한 걸음마다 마음이 담겨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그의 뒷모습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가족을 품은 아버지의 모습 같았다.
이미 몸은 지쳐 있었지만,
그 마음만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위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고,
바람이 옷자락을 스쳤다.
그 순간, 내 마음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저 마음이 오래도록 지켜지기를.’


남편이 법당으로 향하는 사이,
나는 배낭을 다시 챙겼다.
그의 배낭에서 생수 하나와 내 잠바를 꺼내
내 배낭 속으로 옮겨 담았다.
그 짧은 행동이 묘하게 따뜻했다.
이제는 내가 그의 짐을 조금 덜어줄 차례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속임에도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봉정암에서 하룻밤을 보내보고 싶다.’


종무소에 물으니 철야기도를 하는 사람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몇 년 전 오대산에서 보냈던 밤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늦게 하산하는 바람에 버스를 놓쳐
월정사에서 신세를 졌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시기였다.
그 밤, 절 안의 공기는 유난히 맑고 고요했다.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고,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풀어졌다.


이상하게도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그날 이후 나는 회복되었다.
그래서 안다.
사찰에서 보내는 하룻밤이
얼마나 깊고 귀한 경험인지.


‘언젠가 봉정암에서도 꼭 한 번 머물러야지.’
그렇게 내 버킷리스트가 하나 더 늘었다.


남편이 계단을 내려왔다.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 이제 가볼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봉정암을 벗어나 오르는 길,
눈앞에 바위 봉우리가 거대한 기도문처럼 서 있었다.
바위 위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그 틈 사이로 바람이 흘렀다.


그 바람이 내 볼을 스칠 때,
나는 문득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대청으로 가는 길이구나.’


봉정암의 고요함이 뒤로 멀어지고,
산의 숨결이 다시 거칠어졌다.
그러나 그 고요가 내 안에 깊이 남았다.
이제는 그 고요를 품고,
다시 한 걸음씩 바람 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봉정암에서 조금 오르니 소청대피소가 나왔다.
남편의 얼굴이 창백해 보여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여기서 쉬어요.
나는 괜찮아요.”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가자.”
나는 말했다.
“여기 일몰이 아주 끝내주는 곳이래요.”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럼 다음에 일몰 보러 오자.”


앞서가던 일행은 소청에 머물기로 했다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희운각으로 갈 거예요? 내일 날씨 흐리대요.”
“그래요, 우리도 좀 더 올라가 볼게요.”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내일 산에서 봐요.”
인사를 나누었다.


소청에서 대청으로,
그리고 다시 희운각으로 이어지는 길.
오르막은 여전히 이어졌다.


예전에는 남편이 앞서가고 내가 뒤따랐었다.
그가 멀리서 기다리고 있으면
나는 늘 투덜대곤 했다.
“그렇게 먼저 가면 왜 같이 온 거야.”


그런데 오늘은 그 반대였다.
힘겹게 올라오는 남편을 뒤돌아보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맞췄다.
묘하게도 마음이 따뜻했다.


시간이 흘러 서로의 자리가 바뀌었지만,
이제야 진짜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젊을 땐 서로를 앞서가려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서로의 속도에 맞춰 걷는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만 조금씩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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