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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지 못해도 좋은 날

손끝에 기억된 용기, 오늘 나의 또 다른 얼굴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오르지 못해도 좋은 날


몇 년 전이었다.

암벽등반이라는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저 어떤 운동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고, 겁도 많고 소심한 내가 어울릴 수 있을까 망설이면서도, 지역 등산학교에 입교했다.


입교 첫날, 필수 장비를 맞추기 위해 장비 전문점에 들렀더니 사장님이 물었다.

“암벽등반, 얼마나 하실 건가요?”

“저요? 이번 과정만요.”

“그럼 초보자용으로 기본적인 걸로 보여드릴게요.”


그랬다. 정말 딱 그 정도, 경험 삼아 한 번만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내 걸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초를 배운 후에는 서울에 있는 등산학교에 다시 입교했다.

매주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갔고, 여름휴가는 특별과정인 암벽등반으로 꽉 채웠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지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초보다.


무엇이든 꾸준히 해야 실력이 붙는데, 나는 1년에 한두 번 겨우 하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왜 계속 이걸 하게 되는 걸까?


해마다 체력은 조금씩 줄고, 여전히 겁은 많다.

그런데도 좋다.

무서워도, 힘들어도… 이상하게 좋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번엔 친구의 제안으로 도봉산의 ‘낭만길’을 함께 오르기로 했다.

이 길은 초보자에게도 무리가 없다고 했다.

나는 초보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2 피치까지는 무난히 올랐지만, 친구의 잔소리는 이어졌다.

“연습 좀 하랬잖아?”

“무서워…”

“그럼 그만두던가.”

“아냐, 갈 거야.”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한발, 한발 올라갔다.

정상까지는 꼭 가보고 싶었는데, 정상 부근에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친구는 위험하다고 했다. 내려가자고.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경험 많은 친구는 단호했다.

“오늘은 안 되는 날이야.”


결국 우리는 아쉽게 철수했고, 하산길에 비까지 쏟아졌다.

내려오며 생각했다.

아, 정말 욕심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역시, 전문가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거다.


친구는 웃으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초보 일래?”


사실 나도 전문가처럼 되고 싶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 집중하지 못한 탓에, 지금도 나는 초보 암벽등반가일 뿐이다.

그래도 괜찮다.

다만, 함께하는 이들에게 민폐는 되지 않도록, 좀 더 연습은 해야겠다.

왜냐하면 암벽등반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함께 하는 운동이니까.


1년 만에 다시 오른 암벽이었다.

그런데도 매듭법, 빌레이, 하강법까지…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참 신기하다.

잊은 줄 알았던 것들이, 다시 손끝에 살아나는 그 순간.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마주한, 다이내믹한 하루

오르지 못해도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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