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육아 사이에서 흔들리던 날들
_일과 육아 사이에서 흔들리던 날들_
"자녀가 어떻게 되세요?"
"네, 아들만 둘입니다."
내 대답에 상대방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 아들만 둘이라고요?"
이제는 익숙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나는 결혼 전부터 직장에 다녔고, 결혼 후에도 계속 일을 이어갔다. 지금처럼 육아휴직이 자유롭던 시대가 아니었던 30여 년 전,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나는 회사에서 결혼 후에도 계속 근무한 최초의 여직원이었고, 큰아이를 낳고 한 달간 휴가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휴가 내내 울기만 했다. 모유 수유도 한 달이 지나자 강제로 끊어야 했다. 결국 큰아이는 시골 시댁에 맡겨졌고, 나는 매주 주말이면 아이를 보러 갔다. 아이를 보러 가는 길은 늘 설렘으로 가득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매번 눈물로 젖었다.
백일이 지나고 나서야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를 데려왔다. 다행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아이를 봐주겠다고 해서 퇴근 후 종종걸음으로 아이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기고, 서고, 걷는 순간들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남편의 직장 발령으로 제주도로 이사하게 되었고, 나는 회사 최초로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여러 압력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함께하는 1년을 선택했다. 작은아이는 낯가림이 심해 낯선 사람만 보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와 오롯이 마주하며 보낸 시간은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소중한 기억이다.
복직 후 작은아이도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매일 종종걸음을 걸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학교에 급식이 제공되지 않아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를 그냥 쉬게 두지 않았다. 남편이 운영하는 식당을 도와야 했고, 아이들은 어느새 식당과 엄마의 빈자리에 익숙해졌다.
작은아이는 "엄마 언제 와?"라고 전화로 울먹였고, 가게에 데려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데려온 적도 있다. 작은아이는 엄마를 돕겠다고 손님에게 메뉴판을 들고 가기도 했다. 나는 다시는 아이를 가게에 데려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큰아이는 친구들을 집에 자주 데려왔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들어오니 주방에 그릇이 수북했다.
"엄마가 집에 없을 때 친구들 데려오지 말랬지?"
"엄마는 항상 없잖아."
큰아이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을 위해서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 시간에 아이들이 더 필요로 했던 건 따뜻한 집밥보다 엄마의 손길이었다. 이후 시간 조절이 가능한 직장을 찾았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지자체 기관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5년을 일한 뒤, 지금의 직장에 자리 잡은 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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