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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Dec 06. 2019

소회(所懷)

모발기부의 현실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글에는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 거창한 이유는 없고 그냥 귀찮아서 그런다. 상당히 좋지 않은 버릇임을 알고 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집착이 심해서다. 과제 제출 혹은 공모전에 참가할 때는 단어 하나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문장부호까지 병적으로 고치곤 해 마무리가 늦어진다.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지만 이는 시간을 꽤 요구하는 작업이다. 가볍게 즐기기 위해 SNS를 하는데 길어지는 첨삭은 옷으로 치면 TPO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핑계를 대 본다. 물론 이번에도 빡센 퇴고는 하지 않았으나 제목 정도는 붙여보고 싶었다.


소회.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 회포와 같은 말이다. 앞에서도 그렇고 사설이 길었는데, 무엇에 관한 소회냐?

겨우 모았습니다

머리를 잘랐다. 기부의 목적으로 길러왔기 때문에 염색은 물론이요, 파마, 탈색 등 모발에 손상을 주는 행위는 일체 못했다. 스무 살 되고부터 머리를 가만 놔둔 적이 없는데 –병역의 의무를 다하던 시절 제외- 말이다. 이토록 청정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자르지 않았냐, 2017년 10월부터였다. 그렇게 지금, 2019년 7월까지 왔으니 대략 21개월 정도다. 그간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어르신들은 남자가 그게 뭐냐고 혀를 끌끌 차지, 알바하는 곳에서는 매번 자르라 그러지. 안 자르고 버티니까 본사 사람 나와서 면담까지 받은 건 비밀. 아이고, 말해버렸네. 그 외에도 많다. 눈에 잘 띄다 보니 강의 OT 시간에 교수님이 일으켜 세우지, 나이 좀 있으신 손님들은 언니라고 부르지, 화장실에서 손 씻고 있으면 뒤에서 훑어보지. 전부 말하자면 무박 사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니 여기까지만 쓰겠다. 아무튼, 잘랐다고.


어쩌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는 상대방이 기대하던 거창한 무언가와는 거리가 먼 답을 했다. ‘미용실 가는 걸 귀찮아해서 잘 가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길어졌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좋은 일이나 하자는 생각에 했어.’라며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 미용실 가는 걸 귀찮아하는 것은 사실이니 아주 빈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차지하는 비중은 5% 정도이니 주된 이유라고도 할 수는 없겠다. 여전히 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말하는 건 쑥스러우니 좋은 뜻이었다고만 알아줬으면 한다.


원래는 이번이 두 번째 기부였어야 한다. 입대 전에도 하려고 했었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무조건 한 번은 밀어야 하는 머리, 그냥 종량제 봉투에 버려지는 것보다는 좋은 곳에 쓰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불발되었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단순히 ‘기부를 해야 하니까 검은색 머리가 좋겠지?’ 싶어서 완전히 흑발로 덮어버렸다. 바보같이 규정을 염색하고 나서 확인했다. 잘 알아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서일까, 감회가 새롭다.


거울 속 짧은 머리는 어색하기 그지없다. 길었던 시절의 습관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머리를 귀로 넘기곤 -남성 친구들은 이러한 행위에 농담 삼아 욕을 동반하고는 했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답례로 포니테일 해주면 좋아 죽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농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한다. 지금도 눈에 머리카락이 보이면 반사적으로 넘긴다. 머리 감을 때도 후유증이 있다. 무심코 샴푸를 세 번 정도 짰다가 상당량의 거품에 놀라 ‘아 맞다’하고 헹궈내곤 한다. 말리는 과정에서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한다. 똑바로 서서 말리면 머리카락이 머금었던 물이 몸에 줄줄 흘러서, 허리를 굽혀 몸에 머리카락이 닿지 않도록 하여 드라이기를 쓰곤 했다. 이제는 똑바로 서도 괜찮은데, 오늘도 무의식 중에 허리를 접었다. 아직도 침대 옆 협탁에는 뜯지 않은 머리끈 묶음들로 가득하다. 손목이 허전하다.


장발이어서 좋은 점도 많았다. 첫째, 뭘 하든 전문가처럼 보인다. 이건 민머리 분들도 해당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 자석의 N극과 S극은 North와 South가 아닌 None과 Several의 앞글자에서 따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아 이걸 말하려던 게 아닌데 아무튼, 커피를 내리고 있으면 왠지 바리스타 같고,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으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 같다. 어딘가 경지에 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제는 집에 친구들이 놀러 와서 뜬금없이 단소를 불었던 적이 있다. 그때 친구가 찍어준 사진 속 나의 모습이 마치 인간문화재 같아 보여 한참을 웃었다. 둘째, 돈이 덜 든다. 머리를 기르기 전에는 3~5주 주기로 미용실에 갔다. 지난 21개월간은 갈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는 대한민국 평균 남성보다 치킨을 21회 정도 더 섭취했음을 말한다. 위장으로 체험하는 장발의 위력. 정말 싫어하는 단어이긴 한데, 이거야말로 ‘소확행’이다. 맞지? 마지막으로, 개성이 넘친다. 나는 잘 포장해서 말하자면 힙스터, 있는 그대로 말하면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다. 한국에서 남자의 장발은 그리 흔하지 않은 머리이기 때문에, 딱 맘에 들었다! 보너스로, 겨울에 뒷목이 정말 따듯하다.


장점 같지 않은 장점들만 늘어놨지만, 난 정말 좋았다는 걸 확실히 해두고 싶다. 여름을 넘기는 건 좀 힘들었지만 말이다. 유명인들도 많이 한다. SK 와이번스 김광현 선수 등 운동선수들이나 연예인들의 참여로 기부 캠페인은 더욱 활성화됐다. 나도 ‘혹시 김광현 선수 보고 결심하게 되신 건가요?’라는 질문을 두어 차례 받았다. 실제로 2007년 참여자는 42명에 불과했으나 2018년에는 약 2만 7천여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길어지는 머리카락 -탈모이신 분들께는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동참하자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소아암 협회]나 [하이모]의 모발 기부 캠페인은 각각 지난 2월, 4월부로 종료되었다. 협회 측에서는 이를 진행할 인력이 부족해졌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이모] 측도 마찬가지다. 기부 모발을 접수하고 가발 제작에 가능한 모발을 선별하는 업무와 비용이 많이 들어 부득이하게 종료함을 밝혔다. 안타깝게도 향후 재개될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이를 대신해 협회와 하이모는 기부금을 받아 무료 가발 지원을 하고 있다지만, 너무나 아쉽다. 남은 곳은 [어머나 운동본부]뿐이다. 그런데 ‘이곳의 캠페인은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에 대한 자문의 자답에는 긍정의 뉘앙스를 풍길 수가 없다. 협회나 하이모의 캠페인 종료로 인해 기증자가 전부 몰릴 텐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캠페인 참여자가 많아져 그만두게 되었다라,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결국 마지막 기부가 될 것이란 이야기다. 머리 기르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데, 기부도 받아주지 않는다 하거니와 아무런 약품처리도 하지 않고 기를 자신도 없다. 이번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이 매일 기억을 잃어 온몸에 문신으로 중요한 정보를 새겨 놓은 것처럼, 나도 길었던 시절을 새기고 싶었다. 휘발성 기억은 사절이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스>의 주인공 ‘셜록 홈스’처럼 ‘기억의 궁전(Mind Palace)’이 있었다면야 굳이 남길 필요가 없겠지만, 나는 그저 보통의 인간이다. 트리거가 필요하다. 종류는 상관없다. 시각, 후각, 촉각 등 직접 감각한 것이라면 뭐든지 괜찮다.


우리의 뇌는 감각기관에서 수용한 모든 정보를 저장해 놓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단지 떠올리고 싶은 기억에 대한 명확한 키워드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졸업 앨범을 보고 나서야 떠오르는 그 시절 추억 같은 것들이다. 3학년 5반의 이 친구는 교무실에 자주 불려 가곤 했고, 저 친구는 옆 학교 그녀와 사귀었고……. 나의 경우에는 ‘일 년 하고도 아홉 달을 길러 기부를 했다’ 정도는 쉽게 떠오르겠지만 상기한 것과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어떠한 물건이나 행동도 지금의 기억을 완전히 되살려주기 위한 기폭제로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름의 시간을 들여가며 휘갈겨 봤다. 그래도 기억에 남을 한 줄로 요약해보자면, 아 무슨 한 줄 요약이야. 못하겠다. 그간 겪은 게 얼만데, 멋들어지게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역시 그런 건 어울리질 않는다. 상상만 해도 오글거린다.


그래,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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