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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Mar 30. 2020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가 봐요

 놀랍게도 재동은 커피를 싫어했다. 잘 모르기도 했다. 아는 거라곤 레쓰비, 맥심, 테이스터스 초이스같은 인스턴트커피 정도? 아메리카노는 뭐고 에스프레소는 또 뭔가. 500원이면 슈퍼에서 달달한 초코우유 200mL 한 팩 뚝딱인데 굳이 카페까지 찾아가서 마시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흡사 사약 st의 이상한 깜장물의 비주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통촉해달라고 해야 할 것만 같잖은가. 심지어 맛은 쓰기만 한 걸 4천 원씩이나 주고 마셔야 한다는 상황을 재동은 성인이 되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별과제 하잡시고 카페로 모이자는 조장의 오더는 낭패 중 대낭패. ‘이 돈이면 초코우유가 몇 개야.’ 눈물을 흘리며 5천 원 내고 아이스 초코를 시키기 일쑤. 쪽 빨면 순식간에 비워지는 건 초코나 지갑이나 똑같았다. 월말엔 용돈이 떨어져 피치 못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제일 싼 메뉴였으니까. 마시다 보면 어느새 맛있다고 느낄 거라는 말에 꾸역꾸역 들이켰으나 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았다. 실제로 화장실만 엄청나게 들락날락했다. 

   

 커피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뭐야, 라고 물어보면 아마 지금으로부터 대여섯 해 전쯤, 더치 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였다. 엄마가 내어준 컵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향은 재동에게 더위사냥을 연상케 했다. 이내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머금었고, 처음으로 커피도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커피는 나쁜 게 아니었구나. 어릴 적 엄마가 마시던 커피가 맛있어 보여서 한 입만 달라고 하자, 그녀는 재동에게 손으로 머리에 뿔 난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이거 마시면 악마가 된다.’라고 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 커피를 즐기던 시점부터의 재동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닌 듯싶지만, 입에도 대지 않던 시절엔 그 말을 믿었다. 아예 커피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인스턴트커피는 종종 마셨다. 설탕과 크림이 만나면 최소 중박이라는 진리는 어릴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졸음 퇴치보단 그냥 맛있어서 먹는다는 정도에서 남들과 음용 목적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 시절 재동에게 커피란 아마도 초코우유 다운그레이드 버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그에게 2014년쯤 처음 접한 더치 커피는 그간의 인식을 완전히 흔들어놓았다. 쓴맛이 없구나, 달지 않아도 마실 수 있구나. 마시고 나서도 입안이 개운한 느낌은 오히려 우유를 압도했다. 무언가의 하위호환을 벗어난 순간, 커피에 눈을 뜬 순간이다.


 일 벌이기, 새로운 취미 만들기를 즐기는 재동에겐 더할 나위 없었다. 전역 후, 편입 공부를 하느라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카페인을 충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강남 커피 가격은 너무나 비쌌다. 마침 커피를 좋아하는 부모님 덕에 기본적인 재료와 장비는 갖춰져 있고, 낚시나 캠핑 같은 취미에 비하면 향후 투자할 금액도 적었다. ―착각이었다. 후술하겠지만, 돈이 두 배로 들고 있다.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마시는 이도류 전법 덕택―  식후 커피 담당은 재동이 자처했다. 행위 자체가 재미있었으며 커피 내리는 연습도 겸하니 일석이조, 요즘 말론 개이득이다. 어머니가 사오는 원두를 쓰기도 하고, 동네 로스터리에서 직접 사오기도 하고, 종류를 불문하고 일단 내렸다. 책이나 영상을 찾아봤어야 했는데, 미디어에 등장하는 커피 장인들이 한 방울 한 방울 정성들여 내리는 모습이 기억나 무조건 따라 했다. 허접 주제에 저울 같은 건 하수나 쓰는 거라며 항상 감에 의존했고 물줄기는 무조건 얇아야 좋은 줄 알았다. 회고해 보면 무척이나 무식한 방법. 길을 많이 돌아갔지만 조금씩 경험치는 쌓였다. 초보자의 행운이었을까? 당시 내렸던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난다. 커피에서 꽃향기도 나고 블루베리 느낌도 나고. 가히 충격적이었다. 재동의 커피 취향의 가닥이 잡힌 건 그쯤이다.


 미성년 시절 재동은 응당 어른이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하는 기준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잠시 소개하자면, 자고로 어른은 씁쓸한 커피를 즐길 줄 알아야 했다. 집에서 열심히 커피를 내려 마시기 시작하자, 과거에 그토록 기피해왔던 아메리카노에 다시 도전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집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멋진 어른’, ‘커피 좀 마실 줄 아는 놈’이니까, 라는 허영심은 그를 스타벅스로 내몰았다. 어른을 향한 발돋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재동에게는 위대한 도약이었으리라. 이윽고 달의 반대편에 착륙한 그가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파트너는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맞으세요?”

 파트너에게는 주문을 받기 위해 필요한 당연한 질문이었겠지만, 그에겐 수리 (가)형 1등급과 2등급이 갈리는 문항 같았다. 3초의 적막과 서늘한 식은땀이 등골을 가로질렀을 무렵, 떨리는 동공을 내리깐 채 입을 뗐다.


“톨 사이즈가 뭐예요?”


 집안에서 잔뜩 부풀었던 그의 커부심은 온데간데없었다. 문득 서브웨이 생각이 났다. 서브웨이 가봤냐는 친구의 물음에 안양이 무슨 개도국도 아니고 지하철 하나 없는 시골로 아느냐고 그걸 지금 질문이랍시고 하는 거냐며, 지금 서울 사람이라고 유세 부리는 거냐며 발끈했던 그날이, 지하철이 아니라 샌드위치 가게를 말하는 거라는 대답에 화끈했던 그날이. 어디 그뿐이랴. 빵, 채소, 소스 모든 것을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서브웨이의 시스템 앞에 무력감을 느꼈던 기억까지. 삼립 모닝빵에 오뚜기 케첩 정도나 알던 사람에겐 하나하나가 난관이었다. 그깟 허니오트가, 저깟 사우스웨스트 소스가 뇌리를 무차별 폭격했던 그날의 치욕감을 스타벅스에서도 느꼈다. 톨 사이즈 뒤의 재동은 마치 외국인 관광객 같았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네,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일단 뭐가 나오긴 나오니까, 지금의 상황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말은 확실히 해두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윽고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기대감이 상실감으로 바뀌는 건 찰나의 순간이다. 기대가 클수록 그 전환속도도 빨라진다. 얼음을 녹여 커피의 농도를 보리차 수준으로 맞추고 나서야 겨우 마실 수 있었고, 애꿎은 핸드폰만 두들기다 다신 프랜차이즈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카페를 나왔다.


 내 돈 내고 입맛에 안 맞는 걸 굳이 찾아 먹을 필욘 없지, 라고 자위했으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프로세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재동에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 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 고진감래가 다 무슨 소용인가, 견디는 게 힘든데. 감진감래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단물만 쪽 빨자’, ‘매는 먼저 맞으면 아프다’, ‘피할 수 없다면 X됐다’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굳이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진원에 접근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이번에는 커피가 재동의 기질을 터뜨린 것이고, 다른 상황이었더라도 비슷한 결론으로 마무리 지어질 가능성은 다분하다.

   

 절싫중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의 줄임말이다. 재동은 스타벅스 사건 이후 집에서만 커피를 마셨다. 2년쯤 되었을까. 취향은 확고해졌다. 꽃향, 시트러스, 핵과류 혹은 베리 뉘앙스를 풍기는 산미. 더치 커피가 안 쓴 커피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예가체프는 취향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두 이름을 검색하다 나온 ‘스페셜티’라는 개념은 재동에게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재동은 카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전문가가 내려주는 건 얼마나 다를까? 이 원두에서는 무슨 맛이 날까? 가성비 좋은 취미였던 커피는 돈을 두 배로 쓰는 취미가 되었다. 더 나은 맛을 위해 기계를 변경하고, 더 좋은 맛을 위해 원두에 쓰는 돈이 많아지고, 더 많이 알기 위해 카페에 다녔다. 어느 순간부터 취미 수준을 넘어섰고,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다. 한 달 소비 계획 첫 번째가 원두값 책정이라고 말해주면 이해가 쉽겠다.


 요새는 수동 에스프레소 기계를 가지고 노는 재미에 맛들렸다. 최근 독립한 분께 살림살이에 보태시라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전기 포트와 책상용 스탠드를 줬는데, 교환 같은 느낌으로 받았다. 퀄리티는 상업용 반자동 머신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아포가토 같은 디저트 만드는 용도로는 손색이 없다. 카페인 충전재가 이렇게까지 거창해질 줄은 6년 전의 재동으로서는 짐작조차 못 했을 터다. 그렇다면 6년 후는 어떨까, 무엇도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여전히 쓴 커피는 싫어하지 않을까. 오늘도 재동은 커피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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