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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Oct 10. 2022

이렇게 놀러 다녀도 재밌어요 2

계획은 즉흥으로 세우는 거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다. 국내 커피 커뮤니티에선 이를 ‘전통 당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멀쩡히 영업하던 카페가 커뮤니티 유저들이 방문할 때면 왜인지 닫혀있곤 했다. 유달리 기습 휴무를 겪는 사태가 반복되다 보니 이용자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이 정도면 우리 커뮤니티 전통이라 부를 수 있겠다며 나온 표현이다. 내겐 오삼커피바가 그렇다. 못해도 한 해에 한두 번쯤은 제주도에 들렸는데 갈 때마다 임시 휴무였다. 작년인가엔 심지어 출발 전날까지도 영업 공지가 올라왔었다. ‘이번엔 갈 수 있겠구나!’ 설레는 마음에 입도하여 인스타그램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쉼을 가지는 기간에 돌입했다는 피드가 올라와 있었다. 바로 그때 스님이 되긴 글렀다 느꼈다. 해탈은 못 하고 한만 맺혀버렸기 때문. 이번에는 꼭 가리라 칼을 갈았다. 작년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한번 인스타그램을 켰다. 다행히 2022년 7월 10일은 정상영업이다. 우선 숙소에서 짐 좀 풀고 가벼운 심신으로 경건하게 커피를 마셔야겠다.


뚜벅이 여행으로 온 이상 숙소는 대중교통이 많이 지나치는 곳에 위치해야 좋다. 특히나 제주도 같은 관광지는 서울처럼 배차가 많지도 않고 막차도 이른 시간에 마무리다. 제주버스터미널 근처에 잡는 건 당연한 순리. 걸어갈 거리는 아니었기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매번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빌려 다녔기에 배차시간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있었으나 기우였다. 10분쯤 기다리니 원하는 버스가 왔다. 제주 버스터미널에 내리는 거라 하차할 정류장 이름 외우기도 편했다. 될 놈은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 대한 평가가 바뀐다. 대부분은 후한 평을 내리곤 하니 제법 편리한 성격이다. 노래나 들으며 마음속으로 리듬이나 맞추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하려 하니 오버부킹 됐다며 패밀리 룸으로 올려준단다. 이러니 나를 올려치지 않을 수가 있나. 그저 하늘이 점지한 럭키 가이인데. 에어컨 예약 맞춰두고 귀찮았던 가방은 침대에 던져버린다. 미리 싸 둔 크로스백 둘러메고 커피 마시러 나간다.


세월의 흔적은 이리도 다르게 묻어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오삼커피바도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었다. 500m쯤 걸으면 나오는데 아직도 횡단보도 기억이 생생하다. 뭔 뜬금없는 컨테이너에 인테리어 업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데 누가 저기다가 일을 맡기고 싶을까? 이래서 사람 매무새가 중요하다며 카메라 켜서 본인 외관 체크한다. 유니클로에서 산 하와이안 셔츠에 초록 모자. 이거야 원 누가 봐도 관광객이다. 지도에 적힌 대로 좌회전 우회전 난 앞으로만 가 호나우도 무회전 킥 갈기니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오삼커피바 등장이다. 자, 선수 입장. 한국 영화 클리셰 시원하게 되뇌며 문 열어버린다.



내적 친밀감만 잔뜩 쌓인 오삼커피바는 한 번도 못 와본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익숙했다. 언젠가는 사고 싶었던 그라인더 EG-1, 동일 브랜드에서 판매하고 있는 원두 소분용 빈 셀러, 원뿔에 토성의 고리처럼 둘러져 있는 유리가 돌아가는 게 재미있는 시계, 용도를 모르는 노란색 플라스틱 길쭉한 통이 커피 테이블 겸 바에 올려져 있다. 격자 선반이 있는 벽면에는 각종 드리퍼와 커피용품들이 올려져 있다. ‘저 드디어 왔어요’라며 호들갑 떨고 싶었지만 사장님과는 아예 초면이니 입 닫고 주문을 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야 이상한 소리 잔뜩 하고 있지만 혼자 다닐 땐 세상 젠틀맨 코스프레하고 다닌다. 상상할 수 없겠지만 나는 꽤 조용한 편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따뜻하게 주문해서 온전히 커피 맛을 다 느껴봐야지라는 마인드는 이미 걸어오며 흘린 땀과 함께 증발했다. 향미고 뭐고 그냥 시원하게 한잔 주문한다. 물론 게이샤를 고르기야 했지만.


이 구도의 인스타 피드를 대체 몇 개나 봤던 건지


먼저 온 손님들과 담소 나누시던 사장님이 내 커피를 내린다. 추출 루틴을 구경하려던 건 아닌데 바 테이블 특성상 눈앞에서 내 커피가 내려지는 광경을 볼 수밖에 없다. 모든 게 정지한 공간에서 움직이는 거라곤 시계 초침과 사장님의 커피 추출인데 아무리 커피 덕후처럼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나라도 이건 어쩔 수가 없다. 하리오 V60에 물줄기 수려하게 떨어지고 곧 기무라 글라스에 내 커피가 들어간다. 얇디얇은 유리잔에 가득 담겨 나오니 마시기도 전에 어쩐지 청량감이 느껴진다. 내가 쓰고 싶었던 물건이라서인지 괜히 커피가 더 맛있어 보인다. 노트에 관한 사장님 설명 경청하고 드디어 첫 커피 한 입. 커피를 매일 두세 잔씩 마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갑자기 커피를 안 마시면 금단증상처럼 머리가 좀 아프다. 구강에 커피가 퍼져가며 어쩐지 두통이 싹 사라지고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물론 체내에 카페인이 흡수되기엔 아직 한참 남았지만 그리 느껴지는 건 무언가를 마셨다는 행위로 내 욕구 실현을 실체화했기 때문이렸다.


아름답다


정신도 들었겠다 책이나 좀 읽기로 한다. 요새는 옛날보다 독서량이 많이 줄었다. 나는 8살부터 22년간 안경을 꼈더니 마치 한 몸처럼 느껴지는데, 그 어린 나이에 시력 저하의 원인이 책이었다. 너무 많이 가까이에서 봐서 그만 근시가 와 버린 것. 초등학교 1학년 재동이는 원래 멀리 있는 물체는 잘 안 보이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첫 신체 측정을 했을 때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친구들은 시력표를 곧잘 읽어 선생님께서 막대기를 점점 내리는데 나한텐 점점 큰 글자를 읽으라 한다. 알고 보니 이미 내 시력은 0.3. 근시가 심했다. 다행히 생일이 무척 늦어 같은 또래 평균보다 항상 키가 작았다. 덕분에(?) 교실에선 항상 맨 앞 혹은 두세 번째 줄에 앉았다던 삼천포 이야기도 있다. 그렇게 눈 다 상해갈 정도로 책만 읽던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즈음엔 점점 책을 멀리해 일주일에 1~2권이 되었다.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7편짜리 소설도 밤을 꼬박 새워가며 독파하던 버릇은 그대로 있었지만 말이다. 30살의 지금은 분기에 한 편을 읽을까 말까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멀리했다. 돈 벌어야 해서, 오랜만에 친구 만나야 해서, 집안일해야 해서. 유튜브 넷플릭스 한두 편 볼 시간은 양보하지 않는 내가 싫진 않았지만 머리가 굳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상은 모든 정보를 주는 느낌이라 나 스스로 생각할 거리가 줄어든다. 영상 제작자가 정한 대로 따라가야 하니 자의로 무언가를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읽으려고 가져온 책은 두 권, <그리스인 조르바>와 <무진기행> 되시겠다. 조르바는 조금씩 읽어 왔으나 번역이 다소 읽기가 불편하여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여유롭게 독서할 수 있는 환경에서 펼친다면 참고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아 골랐다. <무진기행>은 유명한 문장이나 한두 번 들어보았었다. 언젠가는 읽어야 한다면 여행을 갔을 때라고 정해둔 책이다. 제목에 기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게 선택받은 첫째 이유요, 국내 작가가 썼으니 번역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게 그 둘째 이유가 되었다. 우선은 아직 덜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책갈피를 찾는다. 주인공은 부처 이야기를 했고 조르바는 모두를 광산에서 구해냈다. 조르바를 보고 있노라면 갓 스무 살 때 용돈 벌이 겸 인테리어 현장에 큰아빠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노가다를 하러 간 거다. 큰아빠가 인테리어 업체 사장이었으니 그냥 힘만 쓸 줄 알면 된다고 데려가셨다. 그들이 점심시간마다 막걸리 한 잔씩들 걸치고 논하던 철학적인 이야기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일용직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조르바에게서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속된 말로 ‘조르바는 정말 미친놈이다’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책을 제법 읽었을까,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이 나갔다. 나만 있는 조용한 공간 되겠구나 했는데 사장님께서 인사를 건네신다. “재동님 맞으시죠?”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인스타그램이랑 생긴 게 똑같은데요?” 그도 그럴 게 여행 얼마 전 똑같은 옷을 입고 을밀대에 간 적이 있다. 평소에 내 모습을 자주 드러내진 않는데 같이 간 친구가 내 모습 찍어 스토리를 올렸었다. 왠지 그날따라 리그램해서 게시했는데 그걸 마침 보신 모양이다. 이야기도 이렇게 됐겠다, 그간 오삼커피바를 도전해왔던 내 구구절절 히스토리를 읍소한다. “제가 제주도 올 때마다 커피 마시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제가 오면 쉬시더라구요?” “커피 준비를 많이 하지 않아서 하필 그렇게 되셨나 봐요.” 이후 자연스레 오늘 먹은 식사 이야기를 한다. 짜장면을 먹으러 갔는데 닫아서 노형 쪽으로 갔는데 사장님들이 한국어를 일절 못하셔서 놀랐다, 이거 배짱 장사 너무한 거 아니냐, 그래도 한국에서 장사하는데 인사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하니 노형 쪽이 원래 중국분들이 많이 사신다고 한다. 사장님은 제주도 토박이시라 이곳 사정에 훤하시다. 내 평소 여행은 주로 식도락으로, 음식점을 찾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미리미리 맛집 정보를 저장해둔다. 둘째, 카페에서 음식점을 추천받는다. 경험상 스페셜티 업장에 일하는 사장님들은 입맛이 까다롭다. 커피 맛까지 따져 먹는 사람들이다 보니 음식을 안 가려먹을 리가 있겠냐는 내 지론은 대부분 맞아떨어진다. 오삼커피바 사장님도 그랬다. 특히 면 요리에 정통하셔서 여러 업장을 추천받았다. 네이버 지도에 차곡차곡 저장해 두고 선택지를 늘린다.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커피잔이 바닥을 보였다. 몇 년 만에 성공했는데 한 잔만 마시기엔 다소 아쉽지 않은가. 커피를 마시려 했으나 내 취향인 커피는 다 소진이었다. 그렇다면 호지 차 아포가토로 간다. 일본에선 쉽게 마실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맛 좋은 호지 차를 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줄기까지 함께 찻잎으로 만드는 방식에서 나오는 특유의 물에 젖은 낙엽 냄새가 호불호를 꽤 타는 편인가 보다. 내 스타벅스 최애 메뉴도 호지차 프라푸치노였는데 (한동안 단종이었는데 판매 재개를 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여기 제주도에서 비슷한 느낌의 메뉴를 만났다. 호지 차 파우더를 차선으로 빠르게 격불하여 아이스크림에 붓는다. 역시나 잔은 기무라 글라스. 취향이 확고한 공간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코드가 나와 비슷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툭 치면 깨질 듯이 얇은 유리에 담긴 아포가토는 그 비주얼만큼이나 훌륭한 맛이 났다.


내 눈에만 담음새가 훌륭한 건가


갑자기 사장님이 콜라 이야기를 꺼낸다. 펩시에서는 민트나 고수 씨앗 같은 맛이 난다나? 뭐 원래 콜라야 자양강장제 같은 느낌의 약에서 시작한 것이고, 크래프트 콜라를 만든다는 곳들의 레시피를 보면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니 그리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캔 콜라와 페트병 콜라의 맛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또 내 식음료 허영심을 자극한다. “맛 차이가 난다고요? 에이 그럴 리가 있나요.” “한번 드셔 보실래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노란색 비스포크 냉장고를 열더니 캔에 든 펩시 콜라를 턱하니 꺼내오신다. 순식간에 시작된 테이스팅 거부할 필요는 굳이 없다. 따주신 콜라를 한입 들이킨다. 이야기를 듣고 마셔서 그런지 어쩐지 후미에 고수 향이 맴돈다. 여기서 나도 한마디 거든다. “그런데 캔에 입 대고 마시는 거랑 잔에 따라 마시는 거도 차이 있는 거 아세요?” 전 직장에서 바리스타로 일할 때 오마카세 코스를 진행한 적이 있다. 매장에는 커피 전용잔이 3세트 있었다. 같은 음료라도 잔의 구조를 달리하면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입구가 갈수록 넓어지는 잔은 혀에 음료가 넓게 퍼트려 산미나 커피의 뉘앙스를 선명하게 표현해주고, 입구가 좁아지는 잔은 잔 내부에 아로마 체임버를 형성해 스월링을 하고 먹으면 향미가 폭발적으로 느껴진다는 식이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유리잔에 콜라를 따라 마셔볼 것을 제안했다. 넓은 잔에 콜라를 따르는 사장님의 모습에 홀로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마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뒤돌아 잡수셨기에 마시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단 사실은 미처 모르셨으리. “오, 정말 맛이 다른데요?” 휴, 안도의 한숨.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신 건지 정말 그렇게 느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후 심도 높은 콜라 이야기가 계속됐다.


왼쪽은 입구가 좁아 단맛 위주인 반면 오른쪽은 입구가 넓어 산미 위주입니다.

여자 세 분이 우루루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떠날 때가 됐다 싶었다. 문은 나섰는데 다소 막막하다. ‘적당히 쉬면서 책이나 읽어야지.’ 정도의 내 기준에만 잘 짜인, 남들 보기엔 무척이나 허술한 계획으로 안양을 떠나왔는데 이제야 4시가 조금 넘었다. 만두를 2시쯤 먹었으니 저녁을 아무리 빨리 먹는대도 6~7시는 되어야 할 터. 그동안 무엇을 하며 무위도식할까. 다시 한번 이번 여행의 목적을 되짚는다. 적당히 쉬며 책을 읽는다. 즉 평소에는 하기 힘들었던 일을 쉬는 시간에 한다. 그 일 중 하나가 독서다. 결국 나는 제주에 평소에는 안 하던 짓을 하러 온 것이다. 다른 게 뭐가 있을까. 제법 여유를 즐기며 천천히 하면 좋은 일. 문득 전시 관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예술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전시회를 썩 선호하진 않았다. 올해 2월에 간 MMCA 서울에서 그 편견이 좀 바뀌었다. 잘 몰라도 신기한 거 보니까 제법 나만의 감상도 들었다. 아쉬웠던 건 오히려 진득하게 구경을 못 한 거였다. 친구들의 관람 페이스에 맞추느라 머물고 싶었던 작품을 뒤로하고 서둘러 지나갔다. 제주도엔 마침 아라리오 뮤지엄이 여러 개 있으니 그중에 하나 골라서 들어가 보면 되겠다. 그전에 중고 책방부터 좀 들리고 싶다. 읽는 속도 보니 두 권으로는 아무래도 모자랄 것 같다. 독립 책방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니 몇 군데 나오는데 마침 아라리오 뮤지엄 가는 길 중간에 하나가 있다. 아라리오까지는 도보로 30분이라 한 번에 걸어야 할지 고민했는데 경유지로 책방을 찍으니 쉬어가는 느낌이라 별것 아닌 거 같다. 이로써 저녁 먹기 전까지의 코스 결정 완료! 남은 건 두 다리에 달렸다. 걱정은 없다. 네이버 지도에 도보 15분이 찍히면 보통은 10분쯤 걸린다. 장군님 축지법 쓰는 건 아니고 원래 걷는 속도가 좀 빠르다.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 두 번에 걸쳐 다녀온 국토대장정이 나를 강하게 만든 걸까? 살아가며 걷는다는 행위에 대한 부담은 가져본 적이 없다. 게다가 걸어 다녀야 재밌는(주로 나만 즐김) 간판 구경을 할 수 있다. 역시나 두 개 건졌다. 에바다식당, 서민편의점. 나중에 차릴 내 업장도 뇌리에 박히는 유쾌한 이름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레퍼런스를 찾는 데에 집중하는 단계다.


제 선배님들을 소개합니다

금세 책방에 도착해 목록을 훑어본다. 독립책방엔 사장님의 취향이 물씬 묻어나는 책들이 많다. 문제는 내가 타인에게 그닥 관심이 없다는 것이렸다. 내가 원하는 책이 있는지 없는지만 빠르게 살핀다. 중고 위탁판매 칸에서 한 권을 먼저 발견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썼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체가 가벼워 편하게 읽기 좋다. 주인공들은 하루키를 본 따 만든 것인지, 그의 이상향을 써 내려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 비슷한 인물상을 띤다. 1. 중년의 남자, 2. 혼자 먹을 정도의 음식은 곧잘 함, 3. 수영이나 조깅 등의 가벼운 운동을 즐김, 4. 성욕이 별로 없음, 5. 그럼에도 여자는 끊이질 않음. 이른바 초식남의 전형이라 말할 수 있다. 과연 이번에도 그만의 클리셰를 깨부술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에 골랐다. 한 권은 정 없어 두 권을 사기로 한다. 익숙한 작가의 책을 골랐으니 이번엔 제목은 낯익은데 한 번도 본 적은 없는 책을 고르기로 한다. 그렇게 간택받은 두 번째 책이 <시계태엽 오렌지>다.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의 영화로 더 친숙한데 줄거리는 하나도 모른다. 영화까지 나왔으니 분명 명작이겠다는 예감이 든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고 고르는 것보다 직감에 기대고 싶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적었었던 ‘만들어진 우연’은 이런 식이다. 앨범 커버가 예쁘다는 이유로 음악도 안 들어보고 LP를 사는 거다. 인터넷으로 노래 찾으면 금방 들어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고른 음악이나 책이 결과가 좋으면 ‘역시 내 육감은 맞았어, 럭키 가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한다. 실제로 이런 구매가 한 번도 실패로 이어진 적은 없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약간 무거워진 크로스백 메고 아라리오 뮤지엄으로 갔다. 역시나 뭘 전시하는지는 모르는 채로 입장권을 구매했다. 또 우연을 만들어 보려던 건 아니다. 어차피 미술은 잘 몰라서 정보를 봐도 그게 그거라 귀찮았다. 라커에 짐만 넣어두고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 도합 6층의 전시를 구경했다. 사람이 나뿐이라 정말 최고였다. 조용히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사실 비밀이지만 나밖에 없어서 방귀도 뀌었다. 혹시나 누군가 튀어나올까 조심스러운 방출이었지만 시원하긴 했다. 지저분한 이야기 한 거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건 내 글이니까 독자 여러분들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다시 아라리오로 돌아와서, 나만 이름을 모르고 있었을 멋진 작가들부터 유명한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 아트까지 열심히 관람했다. 작품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신호등과 TV 같은 거로 만든 게 가장 기억에 남아서 사진도 찍었다. 디셉티콘 같기도 한 귀여운 신호등 로봇이 마치 개 산책시키듯 TV를 끌고 다니는 작품이다. 담겨 있을 깊은 의미는 몰라도 보기에 재밌었다. 이거면 된 거 아닐까? 예술을 너무 거창하게 접근해서 문제였나 싶다. 평론가 할 것도 아닌데 꼭 누군가를 설득시킬 정도의 화려한 감상평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다. 혹은 내 예술에 대한 무지를 예술에 대한 비관적 시선으로 피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난 별 감상 안 드는데 이게 정상이지. 아무것도 아닌 미술품에 대단한 것인 척 유난 떠는 너희가 이상한 거야! 그런 걸 느끼는 건 말이 안 돼!’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던 과거의 나는 참 편협했다.


아름다움에 관한 제 지론에 부합합니다. 하나만 있거나 잔뜩 있거나.
디셉티콘 첩자 등장이오

배출(?)과 참회의 시간을 가지니 뇌가 칼로리를 제법 소모한 모양이다. 6시 반인데 슬슬 연료 넣어달라 보채는 위장의 꼬르륵 빈도가 점점 잦아진다. 이상하게 비행기만 타고 오면 꼭 잘 먹지도 않는 술이 먹고 싶다. 아라리오 뮤지엄 근처에 맥파이가 있다는 사실을 뇌가 알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피자 한 판 시키고 책이나 보면서 맥주 두어 잔 때리면 만취해서 숙소 돌아갈 각이 딱 나온다. 지체 없이 맥파이로 갔다. 스피커가 음악을 두 귀로 빵빵 때리는데 무슨 책을 읽겠냐 싶지만 생각보다 잘 읽힌다. 내가 독서에 빠져들 수 있는 환경은 크게 두 가지다. 일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아 청각 자극 없이 시각 정보만 해석하면 되는 곳이거나, 아예 너무 시끄러운 곳이어서 뇌가 지쳐 청각 정보를 해석하길 거부해야 한다. 맥파이는 후자에 완벽히 부합한다. 안내받은 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스캔한다. 쓴맛 없는 맥주를 좋아하니 IBU는 낮은 게 좋겠다. 여름회동 정도가 땡기는데 마침 그에 어울리는 피자도 팔고 있다. 이름이 아마 썸머러빙 피자였을 거다. 화이트 클램이 들어가 짭짤하니 감칠맛 좋을 텐데 고추기름까지 들어가 느끼함도 잡아줄 것 같았다. 도우가 얇은 화덕피자라 1인 1판 무리 없다. 진행시켜!


맥주가 먼저 나왔다. 파인트 잔에 제법 색이 밝다. 거품도 적당히 띄워준 거 같다. 한 입 마신다. 음! 커피 식으로 표현하면 바디는 가볍고 클린 컵이 좋다. 아까 읽다 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먼저 볼까 했는데 <시계태엽 오렌지>의 표지 그림이 자신을 펼치라 부르짖는 것 같다. 어차피 미루며 읽은 거 한 번만 더 미루도록 한다. 맥주 한 입 더 마시고 독서를 시작했다. 배경은 영국,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선(善)과 자유의지를 다룬 책이다. 전부 다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이 정도만 설명하고 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을 공유해 본다. ‘선함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란다, 6655321번아. 선함이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어떤 것이야.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는 거야.’ 

보기만 해도 시원합니다
제로백(100쪽까지 읽는 데 걸리는 시간) 30분일 만큼 훌륭한 책입니다

번역도 꽤 매끄럽게 되어 주인공과 함께 책 속에 들어가 있나 싶을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다. 아마 피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맥주고 뭐고 계속 읽었을지도 모른다. 적당한 타이밍에 등장한 썸머러빙 피자는 왜 ‘여름회동’과 페어링 했는지 알 것만 같은 맛이었다. 짭짤하고 매콤해 자극적인데 같이 딸려 나온 레몬 쭉 짜니 산미까지 더해져 쓰는 지금까지도 맛을 상상하면 군침이 고인다. 화덕피자 특유의 바삭한 도우는 보너스. 맥주가 피자에 지친 혀를 씻어주는 역할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게 비록 그 맛은 가벼우나 존재감은 확실했다. 아, 여름 제주도의 맥파이는 정말 극락이다. 한창 책에선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으나 그건 상상 속 이야기고 이 피맥은 현실이다. 제발 현실을 살라는 인터넷 격언을 격하게 공감하며 평소보다 빠르게 맥주 한 잔을 비웠다. 피자가 반 판이나 남았는데 맹물이랑 마시기엔 아까웠다.


재문철 : 자 여기서 여기서 피자가 자자자자~~ 꽝~~ 아이고 입 속에서 맥주랑 섞여버리네요~!

예정에 없던 맥주 한 잔을 더 시켰다. ‘봄마실’이었던 거 같다. 메밀과 청보리가 들어갔고 IBU는 물론 낮았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술에 매우 약하다. 파인트 1잔이면 이미 기분은 좋아질 대로 좋아졌다. 혀 감각이 둔해졌다는 말이다. ‘구수하니 맛있네’라는 감상평 정도만 내릴 수 있는 상태였다. 책 세 장쯤 읽고 맥주 한 입, 피자 한 입의 루틴을 반복하니 어느새 피자와 맥주가 사라졌다. 이제는 물 마시며 책을 다시 제대로 읽어야지 마음먹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눈꺼풀은 계속 감기는데 머리 혈관의 펌핑감은 엄청나다. 아마 누군가와 같이 와서 대화하는 상황이었다면 졸려서 그냥 듣기만 했을 거다. 숙소로 돌아갈 때가 됐다.


돌아가는 교통편을 생각하지 않고 나왔더니 버스 막차가 이미 끝났다. 걸어가려면 그럴 수야 있겠지만 술 먹으니 소비 감각이 무뎌진다. ‘내가 여행 온 건데 좀 편하게 다니면 안 돼?’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택시 잡고 바로 숙소로 갔다. 기사님이 자꾸 옆에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 “요새 여편네들이 차를 너무 많이 사. 문제야 문제.” 조용히 가고 싶은데 당최 멈출 생각을 않으신다. 안양의 이재동이었다면 아 예 그러셨군요 하고 대화를 끊어낼 텐데 제주도 여행객 이재동은 억지로 맞장구를 쳐주고 싶지가 않았다. “돈 있으면 사는 거지 남들 돈 쓰는 것까지 뭐라 할 거 있나요? 조선 시대도 아니고요.” 예기치 못한 반박이었는지 조용해졌다. 그대로 쭉 갈 줄 알았는데 아니다. 15분쯤 가는 거리에 뭐 그리 할 말이 많으신지 또 한마디 한다. “요새 젊은것들은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아요. 무슨 택시 요금 지불을 계좌이체로 합니까? 내가 장난 같아 보이나?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신용불량자라 계좌가 없는데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요, 이거.” 이상한 거로 화 내시는 와중에도 존댓말 꼬박꼬박 해주시는 게 유머 포인트긴 했지만 대화의 핀트가 엇나가도 너무 엇나갔다. “요새는 다 계좌이체로 해요. 게다가 신용불량자이신지 어떻게 알아요. 처음 본 사람들이잖아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 


편하자고 돈 썼는데 영 불편하게 왔지만 어찌 되었건 숙소에 도착했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11시였다. 평소였으면 한창 초저녁이겠지만 여행지의 시차는 조금 다르다. 알람을 7시에 맞추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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