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위로-유럽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위로: 유럽서 30년의 시간을 건너 사춘기 딸과

by 퍼니준

[칼럼]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위로: 유럽서 30년의 시간을 건너 사춘기 딸과 마주하다

글: 퍼니준 (작가)

사진: 김가온



spain.jpg 스페인 푸라도 성당 앞에서

1. 갱년기와 사춘기, 그 서슬 퍼런 인생의 기로에서

나는 50대 갱년기, 내 딸은 중학교 2학년 사춘기다. 우리 둘 다 인생의 만만치 않은 기로에 서서 서로를 향해 스파크를 튀긴다. 한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귀엽던 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끔은 '악령이 씌었나'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말들이 나에게 날아와 꽂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나를 뒤돌아본다. 나의 중학교 2학년은 어땠나. 그때는 정보를 먼저 아는 자가 세상을 가질 수 있던 시대였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고, 상상을 현실로 보여주는 유일한 통로는 영화였다. 영화 음악에 매료되어 포스터를 모으고, 언젠가 그 영화 속 장소와 사람들을 직접 만나리라 다짐했던 나의 15살. 나 역시 세상을 향해 날을 세웠던, 인생을 뒤바꿨던 시기였다. 지금 딸과 부딪히며 나는 스파크는 어쩌면 평생의 기억으로 남을 섬광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 하나로 딸과의 여행을 결정했다. 아내 역시 갱년기의 입구에서 힘겨워했지만, 일정상 함께하지 못한 채 우리 둘만의 6박 9일 여정이 시작되었다.


2. 두바이의 '신도시'와 포르투갈의 '땅끝'

경유지 두바이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중동이라는 땅을 처음 밟아본 나에게 그곳은 ‘부유한 나라란 이런 것이구나’를 보여주는 거대한 전시장 같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신도시, 혹은 강남의 특수판을 옮겨놓은 듯한 초고층 빌딩숲. 하지만 길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그 넓은 땅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짧았던 경유를 지나 도착한 포르투갈. 내 인생 처음 가본 그곳에서 나는 대서양의 낯선 공기를 마셨다. 물가가 싸고 정감이 넘친다는 이야기에 '한 달 살기'를 꿈꿨던 포르투였지만, 패키지 일정 속 1박 2일은 무언가를 느끼기엔 너무도 짧았다. 사춘기 딸과 단둘이 자유여행을 왔다면 메뉴 하나, 장소 하나를 두고 쏟아졌을 비난이 두려워 선택한 패키지였지만, 그 선택은 옳았다. 유럽의 땅끝마을에서 마주한 엄청난 바람과 바다는 흡사 태종대 같은 촌스러운 익숙함을 주면서도, 우리가 먼 길을 왔음을 실감케 했다.


3. 1995년의 나를 다시 만나다

그리고 스페인. 1995년 군 제대 후 배낭 하나 메고 50일간 유럽을 누비던 그때 이후 30년 만의 방문이다. 당시 스페인은 물가가 싸서 유일하게 호텔에 머물고 옷까지 사 입을 수 있었던 곳, 밤늦게 혼자 바(Bar)에 가서 낯선 이가 주는 술을 조심해야 한다던 긴장감이 서린 곳이었다.

그런데 30년 만에 다시 마주한 스페인은 놀랍도록 변한 게 없었다. 어찌 보면 지루할 만큼 그대로였다. 바둑판처럼 정교하게 짜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골조, 그리고 여전히 짓고 있는 가우디 성당. 30년 전 한국이 개발도상국으로서 외국에 나가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 느꼈던 그 강렬한 임팩트는 사라졌지만, 대신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유럽은, 스페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4. AI 시대,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

서울에서 마케팅과 작가, 스토리텔러로 살아가는 나에게 지금은 사실 두려운 시기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겪은 나에게, AI라는 엄청난 녀석이 일상에 들어온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체득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성격 탓에, '나는 뒤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런데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아, 변하지 않는 것도 가치가 있구나.' 수백 년 전의 가우디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여전히 몇 달 전부터 줄을 서고 예약을 한다. 디지털 세상이 줄 수 있는 지식은 방대하겠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그 오리지널리티의 힘은 이길 수 없다. 빠르게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응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로. 아날로그를 살았고 AI 시대를 살아야 하는 나 같은 '혼혈인'에게 스페인은 그렇게 속삭여주었다.


퍼포먼스.jpg K-드링킹 컬처 프로젝트 스트리트 퍼포먼스 by 소주 아티스트 퍼니준 <사진=김가온>


5. 나의 오리지널리티, 그리고 사춘기 포토그래퍼

이번 여행에서 나는 30년 전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내 딸 역시 과거의 아빠를 만났을 것이다. 지금 당장 딸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10년 후, 딸이 다시 혼자 이곳을 찾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잊고 지냈던 나의 감각을 깨우는 시간이었다. 가우디의 성당이 그러하듯, 내가 쌓아온 경험과 삶 자체가 가치 있는 오리지널리티임을 확인했다.

사춘기 딸과는 수없이 부딪혔지만, 결정적인 순간 딸은 나의 '글로벌 소주 프로젝트' 스트릿 퍼포먼스에 포토그래퍼로 동참해 주었다. 뷰파인더 너머로 나를 담아내던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을 공유하는 동료였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나는 인간성(Humanity)에 집중하고 나만의 답을 키워나갈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가치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다시 한번 느꼈으니까. 갱년기 아빠와 사춘기 딸의 스파크는 꺼지지 않는 기억이 되어, 우리를 다음 삶의 기로로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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