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2025년 4월, 스위스 제네바 CERN
그리움 속도, 시간이 0이라면 속도는 무한대.
유민과 이수가 1995년과 2025년에 겪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민, 2025년 4월, 스위스 제네바 CERN]
나는 프랑스 출장 중, 대학 동기 정석을 보러 제네바로 가는 중이다.
정석이 근무 중인 미국 워싱턴주 핸포드 중력파 관측소(LIGO)는, 내 근무지 시애틀과 차로 3시간 남짓 걸리는 곳이지만, 우린 미국에서도 자주 얼굴 보자 말만 하다가, 결국 대서양 건너서야 얼굴을 본다.
제네바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번엔 진짜 볼 타이밍이네...'
정석은 현재 1년간 교환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어, 유럽 입자물리학 연구소(CERN)에 파견 나와 있다.
사실 정석도 보고 싶긴 했지만, 프랑스에는 참 놀거리가 많기 때문에 잠깐 망설이던 내게, 조만간 장비 점검 일정이 있어서 CERN 실험실 투어와 세계 최대 입자 가속기(LHC) 내부 견학도 가능하다는 정석의 얘기는, 나의 마지막 남은 망설임도 삭여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내게 세계 최대 입자 가속기(LHC)를 눈으로 보고, 심지어 그 가속기 내부도 구경할 기회가 그리 흔하게 오겠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LHC를 육안으로 볼 기회는 오로라를 눈으로 볼 기회만큼 흔한 기회는 아니니까. 정석은 역시 내 관심사를 잘 알아...
연구소 로비.
유민 : "여기서 보냐? 차로 만날 거리를 비행기로 본다"
정석 : "다 그런 거지 모, 우리가 한국 나가야 한국 동기들도 모임 갖는다잖아, 시설 견학 하고 마저 얘기하자 장비 점검에 맞춰서 봐야 해. 장비 멈췄을 때만 내부를 볼 수 있거든"
시설을 보러 지하로 내려가는 길.
찬 공기와 금속 벽면이 만들어내는 진공 같은 적막 속에서, 나는 한참이나 정석을 따라 지하로 내려간다.
드디어 실험 장비가 있는 구역에 다다랐다.
정석 : “유민, 지금 니가 들어가는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정밀하게 측정되고 조율된 공간이야”
정석의 말이 이어졌고,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구조물은 상상을 초월했다.
LHC. 직경 27km의 고리형 입자 가속기.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본 풍광을 머릿속에 그려 보아야 간신히 지금 보고 있는 가속기의 전체 모습이 상상된다.
내가 보고 있는 부분은 전체 구조의 극히 일부분 이겠지만, 여러 장치들이 뱀처럼 구불구불 나열된 구조물의 외관은, 거대한 금속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방사선 경고 마크, 자동화 센서,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연구자들이 분주해 보인다.
정석: “여기서 입자들이 거의 빛의 속도로 달려. 그리고 입자끼리 정면 충돌 시켜서, 빅뱅 0.00000000001초 후와 유사한 조건을 만들어내지”
유민 : "LHC 실험이 우주의 기원, 빅뱅 당시를 최대한 근사하게 재현해서 우리 우주의 기원을 연구한다는 거지?"라는 내 대답에 정석이 씩 웃는다.
정석과 얘기하다 보면, 내가 하는 엔지니어링은 산업 현장에 필요한 공학적 해결책을 찾는 일 같고, 정석이 하는 순수 과학은 진리 추구하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고는 순식간에 발생했다.
슉——
나는 정석의 안내에 따라 운영 콘솔 앞에 서 있다가, 콘솔 옆 LHC 내부 터널 정비문이 열려 있길래, 터널 깊숙한 쪽 모습이 궁금해 머리를 넣어 보는 순간, 아주 미세한 빛의 선이 시야에 스쳤다. 이건 봤다는 느낌보다는 가느다란 선이 망막을 통과한 느낌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소리는 없다. 단지 시야가 순식간에 어그러진다. 모랄까, 눈앞이 번쩍하는 느낌? 까지가 내 마지막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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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5일 지난, 제네바 대학 병원 HUG 회복실]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먼저 보였다. 다시 흐려지는 의식... 몇 번의 깨고 잠들기를 반복하다 옆에 정석이 느껴져 불러본다.
“정석…”
혼잣말처럼 부른 이름에, 옆에 있던 정석이 깨어났다.
정석 : “야, 정신 들었어? 괜찮아?”
유민 : “…여기… 병원?”
정석 : “그래. 제네바 대학 병원(HUG)이야. 5일 동안 자다 깨다 하더라.”
유민 : “…사고? 내가? 나 괜찮은 거야?"
정석 : "응, 살아있어. 니 뇌에 아주 가느다란 실금이 갔단다... 아마 고에너지 입자가 지나간 자리겠지.. 근데 크기 자체는 원체 작은 입자였어서.. 또 실금 자체도 폭이 좁아.. 그래서 니가 지금 살아있는 거지... 나도 십년감수했어... 살아줘서 고맙다.. 에효. 좀 있음 주치의가 올 테니 자세한 설명은 의사에게 니가 다시 들어"
유민 : "사고가 왜? 아이고.. 아프다"
정석 : "관람이 끝나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장비팀이 장비를 재가동시켰다. 유지보수 중 꺼뒀던 Kill Switch는 다시 켜지지 않은 상태였데.."
유민 : "kill switch?"
정석 : "LHC 장비 문이 열려 있음 장비가 자동으로 멈추는 기능이야, 일종의 이중 안전장치지"
제네바 대학 병원 병상에서 담당 주치의가 설명해 준 내용을 내 나름으로 이해해 보면, 정석 말대로 뇌에 마이크로센티미터 폭의 가느다란 손상은 발생했다. 그러나, 이후 여러 테스트를 했을 때 일상생활에 필요한 인지 기능과 기억, 의식에 큰 영향이 없어 보이며 이후 몇 주간 추적 관찰하는 조건으로 퇴원도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유민 : "퇴원하는 건 좋은데, 이 의사들 믿을 수 있나? 돌팔이 같아.. 고에너지 입자에 맞은 환자를 10일 만에 퇴원이라니... 그냥 환자 내보내고 싶은 거 아냐?"
정석 : "음... 너 까칠한 거 보니 정상이야. "
나는 더 모라 하려다가, 내심 이렇게 대화하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어... 쉬고 싶어졌다. 사실 내가 지금 느끼는 증상은, '세계가 좀 낯설게 느껴진다'정도니까.
정석이 CERN 연구소로 돌아간 후 혼자 누워 있는 병실 천장 하얀 형광등 아래, 정적만이 가득하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고, 병실 기계음은 일정한 박동으로 이어진다.
그래 죽다 살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소리가 들린다. 이명인가 생각하는데 또렷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형광등 불빛만으로도 현기증이 나는 건가 싶어 눈을 감는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감각이 더 또렷해지는데.
“유민...”
처음엔 환청이라 여겼다. 그리고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소리에 더 집중하니 분명 내 이름을 부른 거다.
“이수...?”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아래의 문장이 명멸한다.
YUMIN_002:: SESSION_INITIATED...
그 아래, 아주 미세하게 반짝이는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귀에 들리는 감각이 아니다. 머릿속에 까만 모니터가 있다면 90년대 초반 DOS 운영체제에서 PC 통신을 하는 느낌이랄까.
이수 : “유민, 나는 살아있어. 다른 차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