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2025년 7월, 시애틀 / 유민, 1995년 7월, 시애틀
[유민, 2025년 7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바람이 분다.
시애틀 항만 워터프론트 공원. 잔잔한 물결이 부두 끝을 어루만지고, 대관람차는 천천히 회전한다. 해는 높았지만 바닷바람은 살결을 스치며 기분 좋은 시원함을 남긴다. 나비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밭 위를 날고 있다. 마치 질량이 없는 것처럼.
제네바 사고 이후 한 달간의 병원 치료를 마친 뒤 시애틀로 돌아온 지 두 달이 넘어간다. 시애틀 워싱턴 주립대 병원에서 재검사 결과 뇌 전두엽에 미세한 점이 보이고 그 뒤로 가늘고 긴 바늘 같은 상흔이 생겼으나, 인지 검사, 신체 활동과 정신 활동 검사에서 특이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간헐적인 두통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때마다 현기증에 눈을 감으면 머릿속 어딘가에서,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이 마치 윈도우 command창의 흰색 프롬프트처럼 점멸하곤 한다.
처음엔 단순한 사고 후유증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점 반복 주기는 짧아지고 있다.
'차원, 세계... 까마귀'
어느 날부터인가, 태그처럼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엿보이는 이름 하나.
‘이수’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진동이 느껴진다. 마치 내 두개골 안쪽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작은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규칙적인 진동이다.
문장 하나가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부웅 떠오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기 신호처럼 직조된 감각 같다.
'YUMIN_002:: 차원 경계 접속 감지...'
현기증 속 바람이 느껴진다. 현기증 때문인지 실제 바람인지 헷갈려 눈을 떠 보려 할 때, 까마귀 한 마리가 옆을 스쳐 날아간다. 순간 30년 전, 이수와 함께 까마귀를 쫓아 뛰던 일도 함께 떠올랐다.
한번 열린 기억의 틈은 나를 1995년 여름, 시애틀, 이수와 함께 걷고 뛰던 그 순간으로, 그 공간으로 빠져들게 한다.
대학교 3학년이던 95년 7월 여름 방학, 나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드는 M사의 최종 면접을 보기 위해, 시애틀에 위치한 본사 방문 중이었다. 당시 M사는 텍스트 기반 컴퓨터 운영체제가 대부분이던 컴퓨터 시장에, 그래픽 UI 기반 운영체제를 미국에 8월 출시 예정이었고, 95년 12월까지 한국 시장에 출시를 원하고 있었다. 아직 학생이었던 나에겐 꼭 잡고 싶은 파격적인 기회였다. 당시 M사 대표도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설립한 인물이라 학력보다는 실무를 많이 봐준 덕에 내게 열린 기회다. 그래도 학생 신분에 얻게 된 좋은 기회라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자, 내 베스트프렌드이자 여자친구인 이수를 조르고 졸라 함께 왔다. 대학 1학년 입학과 동시에 만난 우리는 말이 잘 통해 금방 술친구가 됐었다. 이수와 함께라면 3일에 걸친 M사의 다면 면접도 차분히 잘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도 시애틀 퓨젯사운드 앞 워터프론트 공원에는 지금 같은 시원한 바다 바람이 불었다.
[유민, 1995년 7월, 시애틀]
이수 : “시애틀 바다 바람 너무 좋다, 재작년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단성사에서 함께 볼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같이 시애틀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 어제 인천공항에서 출발할 때 한국이 일요일이었거든, 근데 11시간 비행 후 시애틀 도착해서도 일요일인 것도 이상하지만 신나~ 하루를 번 것 같아서! 꼭 타임슬립 여행 온 것 같아~!”
이수가 웃으며 말한다.
나는 ‘무거운 물체 주변에 시간 지연 효과가 발생하는데, 너 갑자기 살찐 거 아냐? 블랙홀 수준으로?’ 농을 하려다 말고 “시차 때문에 그렇지 모.” 짧게 대답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농을 했으면, 또또 아재 개그한다고 핀잔 먹었을 거야.. 잘 참았어..’ 속으로 나를 칭찬하는 나다.
이때,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흔들리며 활강하듯 다가온 까마귀. 마치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이다. 질량이 없는 것처럼. 묘하게 자주 눈에 띄는 까마귀다.
이수 : “저 까마귀 아까부터 보지 않았어? 유난히 몸이 커서 자꾸 눈에 띄네. 미국은 까마귀도 큰가 봐. 따라가 볼래?”
유민 : "날 수 있다면... 쿨럭" 갑작스런 옆구리 통증으로 말을 끝내긴 어렵다. 그렇다고 내 옆구리에 팔꿈치를 꽂아 넣은 이수를 쳐다볼 순 없다.
우리는 말없이 워터프론트 길을 따라 따라 걷는다.
공원 위 고가도로가 만들어주는 그늘이 시원하다. 길 중간, 회색 벽돌 건물 전면에 걸린 세월의 빛바램이 묻어나는 크림슨색 간판 위에 'SEATTLE ANTIQUES MARKET' 문구가 보인다.
유민 : "저기 가볼까?" 옆구리 통증을 이겨낸 내 첫마디다.
문을 열자, 오래된 종소리가 가게 안을 울린다. 어둑한 조명 아래, 빈티지 가구와 오래된 악기, 낡은 잡지와 책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먼지 쌓인 물품 사이를 지나던 이수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유민, 이거 봐!!”
처음엔 무엇을 보라고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대놓고 '뭘 보라는 거야?' 할 수 도 없다. 최대한 신경을 끌어모아 집중한다. "응? 뭐?" 최대치 미소와 함께 묻는다. 상황 이해를 위한 추가 정보를 모아야 하니까.
이수가 다시 가리킨 건 여러 잡동사니가 올려져 있는 그저 오래되어 보이는 책상이다.
유민 : “응, 동양적인걸? 한국 건가? 오래돼 보인다..”
이수 : “아니 아니, 책상 말고 이 신문 말이야. “
책상 위에는 헌 신문더미가 보이는데, 이수가 가리킨 건 신문 더미 제일 위다.
한자가 많아 한눈에 내용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시 본문의 시각적 이미지 만으로 알 수 있다. 기억이 난다. 이상 시 오감도. 그러고 나서 눈에 들어오는 한자 제목 오감도(烏瞰圖). 고등학교 수업 중,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한번은 짚고 넘어가는 그 시다. 그걸 여기 시애틀에서 보네...
유민 : “아니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이수는 조심스레 신문더미 맨 위 첫 장을 꺼낸다. 신문 상단을 보니 '<조선 중앙일보> 1934.7.28‘ 이란 문자가 보인다. 상당히 바래서 내 짐작이 들어가긴 하지만...
이수 : "이거 같이 프로젝트하는 김교수님 갖다 드리면 엄청 좋아하시겠다 ㅎㅎ"
유민 : "김 교수님?"
이수 : " 나 금년 봄 학기부터 국문과 김교수님 프로젝트 같이 하고 있잖아, 시애틀 오기 전에 술 먹던 날, 말했는데, 기억 안 나?
유민 : "아... 그랬지..." 일단 시간을 벌고 본다.
이수 : "내가 말했던, 봄학기부터 시작한 프로젝트. 내가 이 프로젝트 때문에 여름 방학에도 바쁘다고 했잖아, 이상 시인의 시집을 데이터화해서 수리적 패턴 찾기, 데이터 마이닝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 시 해석하기거든. 내가 맡은 부분이 오감도에 데이터 마이닝 기법을 적용해서, 혹시 데이터화시킨 시에서 자연어 아닌 수리적 패턴이 있나 찾아보는 거야. 국문학과 입장은 자연어 해석으로는 도저히 문맥이 안 잡힌 데나 모래나. 이상 시에 수와 상징이 많이 쓰이니, 우리 과 교수님께 협업 의뢰가 온 거 같은데... 국문과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가 봐.. 언어로 된 시를 숫자와 데이터로 분석해 보겠다니.. 나도 처음엔 교수님이 학부 연구원 자리를 제안하셨을 때, 어차피 대학원 지도 교수님으로 생각하고 있던 분이시고, 또 알바 급여도 짭짤해서 냉큼 네 알겠습니다 하긴 했었는데... 막상 프로젝트 설명 듣고 속으로 아연실색했었어. 그래서 그날 너한테 술 마시러 가자고 했던 거지. 특히 오감도 시제4호는 아예 숫자로 쓰인 시야. 지금 이 신문에 있는 있는 이 시 말이야"
그제야 난 온전히 기억이 났다. 금년 봄 어느 날, 이수로부터 갑자기 술 먹고 싶다고 연락 왔던 날이... 난 그냥 이수랑 같이 마시는 거가 좋아서 얘기엔 그리 집중하지 않았었는데.. 이상 시인 건이었던 건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시간에 잠깐 본 시였고, 고등학교 수업시간 때 본 이 시에 대한 첫인상은 이게 시인가? 참 괴상하구먼 하고 지나갔던..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이수 덕에 한 번쯤 더 떠올려 보게 됐던 그 시.
이수는 이 오래된 신문을 $10불에 주고 산다. 가게 점원과 흥정도 없이.
난 "아니 맥도널드에서 빅맥 3~4개를 사 먹을 수 있는 금액인데, 신문 한 장을... 그냥 갖고 나가도 될 것 같은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랐지만. 말하지 않는다. 난 평화주의자니까...
이후 오후 내내 이수는 말도 없이 생각이 골똘하다. 아마 국문과와 협업 프로젝트 일이 떠올라 그런 것 같지만 난 더 묻지 않고 조용히 함께 걷는다.
나도 이날 오전 M사와의 면접 결과가 어떨지 기다리고 있던 입장이라 생각에 여유가 없기도 하다. 우린 말없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을 이리저리 맴돌다, 한 pub(호프집)에 들어가 바텐더가 추천하는 시애틀 지역에서만 판다는 생맥주 Mac & Jack을 한잔씩 한 후, 얘기를 이어간다. Mac & Jack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대학 입학한 해 설립된 시애틀 지역 맥주라 하니 더 정감 간다. 또 병맥주나 캔맥주는 아직 만들지 않아 한국 가면 먹을 수 도 없다.
이수 : “유민, 기억나? 지난 봄에 말이야...” 로 얘기를 이어나간다.
내 기억상 국문과 프로젝트라면 막 봄 학기가 시작했을 무렵이니 3월 말쯤이다.
이수 : "내가 지도 교수님께, '왜 하필 이상 시인의 시인가요? 사실 전 하나도 이해가 안 가요...' 했더니, '이상 시인은 언어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했던 사람이야. 너처럼 수치에 예민한 사람에겐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될 거다.'라는 거야.. 모 어쩌라는 말인지 모르겠더라고. 어떻게 데이터화해야 할지, 어떻게 데이터 마이닝을 적용 하란건지.. 그러다 시제 4호를 보았을 때, 문득 멈췄어. 시 자체가 숫자로 쓰여있었거든.. 4호부터 시작해 볼까 생각했어. 그래도 막막했지만.. 근데 이 시를 지금 여기 시애틀에서 다시 보니까 이런 우연이 있나 싶네... 어쨌든 데이터화 수치화 하면 패턴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도 들어..."
이수의 목소리는 얘기 뒤로 갈 수로 작아지고 힘이 빠진다. 그래도 1000일을 함께 보냈는데... 이건 자기 확신이 없으니 좀 생각을 보태달라는 SOS 신호다.
난 그제야 오랜 신문지 위에 시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수의 눈빛이 꽤 진지했으니까.
노트북을 꺼내, 워드 프로그램을 띄워 찬찬히 시를 옮겨 적어 가독성을 높인다. 오랜 신문이고 한국 가져갈 자료라는 이수의 말에 자료 보존도 필요하니, 계속 신문을 뒤척이는 건 나도 불편하다. 맥주라도 쏟았다간... 그 이후는 생각하기도 싫다.
노트북 파일로 옮겨 적고 보니 '진단 0∙1'이 눈에 들어온다.
컴퓨터 공학도인 나에겐 이진수 또는 비트를 얘기할 때 너무 익숙한 표현이 아닌가? 한번 이진수로 바꿔볼까?
이수나 나나 종이와 연필이 없어, 바텐더에게 요구하니, 냅킨과 펜을 준다. 십진수를 이진수로 바꾸려고 냅킨에서 연필로 계산식을 쓰다 보니 냅킨이 자꾸 찢어진다. 바 테이블에 물기가 많아, 냅킨이 잘 젖어서인 것 같다.
노트북에 엑셀을 띄워 10진수를 2진수로 바꿔주는 함수가 있나 찾아보니, 없다.
매크로를 짜서 하는 게 빠르겠는걸.. 노트북에 Visual Studio 띄워 10진수를 2진수로 바꿔주는 함수를 작성한다.
Function DecToBin(n As Long) As String
Do While n > 0
DecToBin = Trim$(n Mod 2) & DecToBin
n = n \ 2
Loop
If DecToBin = "" Then DecToBin = "0"
End Function
테스트로 DecToBin(10) 하니 결과값으로 “1010”이 나온다. 동작하네...
이수 : “올~ 너 아직 술을 덜 마셨나봐, 급조한 함수가 동작도 하네 ㅎㅎ”
이수 말을 흘려들으며 다음 단계로 가본다. 이젠 이수 보다 내가 더 흥미를 느낀다.
일단 시를 이진수로 만들어보자.
유민 : "바꿔놓고 보니 이거 왠지 기계어 같은데...?"
이수 : "응? 기계어?"
유민 : "아.. 컴퓨터 프로그램의 원시 언어야. 1960년대에는 하드웨어도 지금보다 열악하고, 기술 발전이 안되어 있어서, 사람이 직접 기계가 알아듣게 코드를 짰어야 했어. 기계는 0,1 밖에 모르거든. 0과 1에 약속된 세기의 전기 에너지로 표현해서 기계에게 할 일을 시켰어. 요즘 너 실험실에서 C 언어 자주 쓰지? C언어는 코드를 보면 그래도 영어 같잖아? 근데 C언어도 컴파일 단계를 거치면 결국 다시 0,1로 바뀌어 CPU에게 전달돼. 반도체 칩 보면 지네 다리처럼 생긴 곳으로 0이면 0볼트, 1이면 5볼트 전기 신호를 보내지. 그럼 CPU 안에 설계된 회로가 약속된 연산을 하는 거야.. 그래서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밑바닥에는 사실 0과 1만 존재해.
프로그래밍 언어는 아래처럼 변해왔어. 기계 친화적인 언어에서 인간 친화적인 언어로 변화해 왔다고 생각해도 좋아"
나는 냅킨을 넓게 펼쳐 아래 그림을 간단히 도식해 이수에게 보여준다.
이수 : “유민, 야! 너 너무 멀리 나가는데.. 일견 보면 0101로 구성된 기계어 코드 같지만.... 그냥 같은 패턴의 반복이잖아, 원래 시가 10진수의 반복 패턴이 있었으니, 2진수 코드도 반복되겠지...
게다가, 시 발표 연도를 보면 1934년인데... 이거 한국이 일제랑 치고 박고 싸우던 이 당시에 이게 이런 개념의 사회적 논의가 가능해?”
나도 듣고 보니 그랬다.
유민 : “흠... 그러게... 나 지난 봄학기에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과목 들었거든. 그래서 좀 따끈하게 기억하는데.. 니 말 듣고 보니 *클로드 섀넌이 0,1 신호로 논리 연산 수행 디지털회로 기본 개념을 확립해서 현대 전자 컴퓨터 설계의 토대를 마련한 1937년도 보다 이상의 시가 3년이나 빠르긴 해.. 일본이랑 치고 박고 있던 이 시기에 정말 이런 인물이 과학 기술계에 있었다면... 우리나라 근대사 현대사는 다르게 쓰여졌겠지..."
이수 : “맥주나 마셔... 너 넘 멀리 간 것 같아. 이거 한국에서는 못 먹는 맥주라며?! 나도 뜻밖의 장소에서 내가 하고 있는 국문과 협업 프로젝트 관련 자료를 만나 좀 흥분했었나 봐"
아, 그런가? 하던 차에 시의 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진단 0·1" 아래
26 10 1931 숫자 사이 점이 공백이고 숫자 뒤엔 앤캐리가 아닌 공백이 있다면... 시 본문의 숫자와 26 10 1931 자릿수가 같아지지 않을까?
위 수를 방금 만든 매크로를 써서 이진수로 바꾸면...
변환된 이진수는 이상의 시 본문을 이진수로 변환한 시열과 열이 딱 맞는다.
유민 : "가만... 이건 전형적인 평문(암호화 할 대상)과 키(key) 관계로 보이는데.. 이진수로 변환시킨 비트라서 흔하게 암호화/복호화에 사용하는 XOR 연산자도 바로 적용 가능해..."
이수 : “응? 야, 나도 대강 전산 공부는 했는데.. 그래도 좀 알아듣게 풀어서 설명해 봐"
그제야, 난 나 혼자 냅킨을 펼쳐 정신없이 써 내려간 걸 깨닫고 이수에게 설명한다.
유민 : "외부에 따로 필요한 조건 없이, 암호화할 대상(평문)과 암호화에 사용할 키값이 있다면, 바로 암호화 복호화 하는데 활용되는 연산자가 XOR이야. XOR 연산자 특징은 두 연산 대상이 서로 다르면 결과값으로 1, 같으면 0을 리턴해. 즉, 암호화할 대상인 평문에 키로 한번 XOR 연산자를 적용하면 암호화가 되고, 암호화된 암호문에 다시 동일 키를 XOR로 적용하면 다시 평문으로 돌아가는 효과가 발생하거든. 해서, XOR 연산자는 비트를 토글(연산대상 1의 연산값은 0으로, 0은 1로)하거나 암호화할 때 유용한, 마법과 같은 연산자야.
우리 전산 전공자들은 XOR를 암호화/복호화에 아주 찰떡궁합 연산자로 자주 활용하지. 간단하지만 강력해, 비트 연산에 활용하면 속도도 아주 빠르고.
즉, 아래처럼 두 줄 요약할 수 있어.
# 평문 XOR 키 → 평문이 암호문으로 변경
# 암호문 XOR 키 → 암호문이 복호화되어 원래 문장인 평문으로 변경
이게 가능한 이유는 XOR이 자기 자신과 한 번 더 XOR하면 원래 값이 나오는 성질 때문이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난 다시 냅킨을 얻어와 아래 예시를 적어 이수의 이해를 한번 더 돕는다.
[암호화]
1010 (평문)
XOR
0110 (키)
-----------------------
1100 (암호문)
[복호화]
1100 (암호문)
XOR
0110 (동일 키)
-----------------------
1010 (복원된 평문)
맥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는 이수를 보고, 난 내 생각을 이어 말한다.
유민 : "1990년대 지금 상식으로는 당연히, 암호화 대상인 평문과 암호화 키를 따로 보관하고 숨기는 게 관행이지. 암호문을 주고받는 대상자들끼리만 몰래 키를 공유해. 그래야겠지?
근데 이 신문은 1930년대 문서잖아, 내가 갖고 있는 90년대 상식으론, 평문과 암호키를 같이 보인다는게 말도 안 되지만... 이때는 1930년대... 우리가 작년에 독서 토론회에서 읽고 재밌어했던 에드거 앨런 포의 '도난당한 편지' 기억나? 경찰이 수사 대상 용의자 집의 가구를 해체하고 현미경으로 먼지까지 들여다보지만 결국 수사하는 내내 못 찾던 편지를, 범인의 집 벽에 아무렇게나 걸린 편지 봉투 안에서 찾으며 탐정 오퀴스트 뒤팽은 이렇게 말했지? '편지를 숨기려면 너무 교묘하게 숨기기보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지만 가장 의심하지 않는 장소에 둬야 한다' 만약 이상 시인도 같은 생각을 한 거라면...
평문과 키값이 한 문서에 같이 표현되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가능할 것 같아... 그래서 시를 암호문으로, 진단 0∙1 아래 26 10 1931 을 키값으로 상정하고.. 한번 복호화해볼게"
이수 : "야! 알겠으니까, 빨리 해봐, 넌 참 말이 많아"
이제 이수는 머리를 싸잡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있다.
아니 설명해 달랄 땐 언제고, 이젠 면박을.. 이란 말이 목구멍을 치고 내려갔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난 평화주의자니까... 냅킨에 복호화 결과를 빠르게 그려 이수에게 보여준다.
이수 : "야! 복호화하려면 암호문처럼 10진수까지 변환해서 보여줘야지, 하나 하나 말을 해야 해?"
유민 : "아니 하고 있잖아! 냅킨 한 장에 다 안 들어가서 그래..."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다른 냅킨을 펼친다.
유민 : "오감도 시제4호의 시 본문을 암호문이라 상정했을 때, 여기 다시 십진수로 복원한게 원래 평문일 것 같아"
이수는 냅킨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이수 : "그래서..이게 모꼬? 어쩌라고? 그냥 또 다른 난수((亂數, random number) 테이블이잖아. 괜히 한참 따라갔네.. 맥주나 마셔!!
유민 : "이상 시인...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이수 : "한잔 더, 콜?"을 외치는 이수의 눈빛은 다시 올라온 취기로 몽환적이다. 아깐 내 말을 따라오느라 잠시 취기를 누르고 있던건가?
유민 : “내일 귀국 비행기 타야 하는데...”
이수 : "그러니까,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지역 맥주라며.. Mac & Jack 한잔 더 해야지!?"
유민 : “그래! Mac & Jack 양조장도 우리가 대학 입학했을 때 처음 만들어졌으니, 우리랑 동기 아니겠어? 가즈아! 동기 같은 맥주는 먹어줘야지~”
이렇게 95년 7월 시애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지나간다.
[유민, 2025년 7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1995년 이수와 여기 시애틀 워터프론트에서 보낸 추억과 상념 속에 걷던 나는, 문득 자동차 경적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95년 여름에 이수와 들렸던 Seattle Antiques Market앞이다.
여기서 이상 시인의 오감도 시제 4호가 실린 1930년대 신문을 이수가 찾았었지... 하며 가게 안을 둘러보던 중...
https://youtube.com/shorts/3OJVJntc5a0
아니 이 의자가 어떻게 여기에? 이건 95년 여름, 시애틀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종로 인사동에서 이수랑 봤던 의자 같은데.. 내 금반지를 채간 까마귀를 쫓아 골동품 가게에서 봤던.. 저 삼태극 문양이 또렷이 기억난다. 이수가 실종된 95년 8월, 남은 여름 내내 난 이수의 흔적을 찾으려 이수와 함께 방문했던 장소들을 몇 번씩 찾아가지 않았던가? 저 의자에 앉고 일어난 직후 이상하게 행동했던 이수가 생각나, 이수의 실종 이후 몇 번이고 다시 방문했던 인사동 골동품 가게. 거기서 본 그 의자가 틀림없다.
Seattle Antiques Market 주인이 원하는 금액을 별말 없이 치르고, 의자를 레드몬드 집으로 배송해 달라 요청했다. 레드몬드 집으로 오는 길, 상념에 젖어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시애틀에서 레드몬드로 이어지는 lake washington 위 520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는 내내 두통과 이명... 그리고 두통과 이명 사이 이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꼭 예전 2G 전화기로 간신히 데이터를 쓰는 그런 느낌이랄까.
[주석]
*클로드 섀넌 : https://share.google/dl4L3uz5NGSxYYURn
디지털 회로, 디지털 통신, 데이터 압축의 기반 이론을 거의 혼자서 다 만들어낸 천재 수학자이자 컴퓨터과학자. 디지털 회로 이론과 정보이론의 창시자이다. 정보 엔트로피 개념과 비트라는 단어는 이 사람이 창안한 것이다. 디지털 회로 이론, 정보이론 등 이전에 없던 중요한 학문 분야들을 여럿 창시했고, 신호처리, 이동통신, 유선통신, 데이터 압축, 암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현대 문명을 설계한 천재 수학자, 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