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Rainier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잊고 있던 건 나였다.
가족과 함께한 레이니어 산행
워싱턴 주의 상징, 마운트 레이니어. 해발 4,392m, 미국 본토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활화산입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태평양 북서부 어디에서든 그 흰 정상의 위엄을 볼 수 있죠. 원주민들이 ‘눈을 가진 봉우리’라는 뜻의 타코마(Tahoma)라 불렀던 이 산은, 수많은 빙하와 강을 품고 지역 생태계를 지탱하며 해마다 수백만 명을 불러들이는 순례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덧붙여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95를 출시할 때 기본 폰트 이름으로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산의 원주민 명칭 Tahoma였습니다.
산을 향한 여정
8월의 끝자락, 방학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가족들과 레이니어 산으로 향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7시 출발해 에넘클로(Enumclaw)를 지나 점점 가까워지는 레이니어 산을 향해 달렸습니다.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산은 구름 위에 홀로 떠 있는 거대한 신처럼 보였습니다. 정상의 눈과 얼음은 반짝였고, 그 아래로는 짙은 숲이 산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도시의 무거운 공기는 멀어지고, 산이 우리를 부르는 듯한 기대감이 차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자연
레이니어 산 근처 도시 타코마(Tacoma, 이 도시 이름도 Tahoma에서 유래했다 함)를 스쳐 국립공원에 들어서자 끝없이 이어지는 침엽수림이 펼쳐졌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소나무와 전나무 사이로 때때로 빛나는 만년설의 흰 자락이 보였습니다. 등산로에 들어서니 길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멀리서 빙하가 녹아내려 흐르는 폭포 소리가 웅웅 울려 퍼집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길이 바스락거렸고, 솔잎, 흙, 들꽃 냄새가 코끝을 스치웁니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산에 가까이 갈수록 바람은 서늘해집니다. 산행의 시작은 Paradise라는 곳에서 시작했고, 눈이 보이는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작은 다람쥐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한 마리는 두 발로 서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봤습니다. 먹을 것을 기대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죠. 빙하와 만년설을 품은 웅장한 산의 고요함 속에서 만난 작은 생명에 피곤해지던 발걸음에 다시 활력이 차오릅니다.
거대한 풍광 앞에 서다
트레일은 점점 더 가팔라졌지만, 눈앞에도, 또 뒤를 돌아볼 때마다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산 너머로 겹겹이 이어진 봉우리들, 하늘에 닿을 듯한 초록 능선, 그리고 정상에 다가갈수록 레이니어 봉우리 빙하의 위용은 점점 커져, 어느 순간 눈을 들어 앞을 보면 푸른빛이 도는 빙하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지만, 카메라 프레임에 담기에는 산이 너무나도 커졌습니다. 그 거대한 풍경 앞에선 누구나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산이 나눠준 평온
돌아오는 길, 뒷유리에는 점점 작아지는 레이니어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도시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우리를 맞이하겠지만, 산에서 얻은 고요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일상에 매몰되어 잠시 잊고 지냈을 뿐이었네요. 레이니어의 흰 푸른 정상이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마음속에 선명히 떠오릅니다.
바쁘고 지치는 어느 날, 눈을 들어 레이니어 산을 찾으면, 나를 부드럽게 안아 줄 것만 같은 친밀감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