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2025년 8월, 워싱턴주 레드몬드
[유민, 2025년 8월, 워싱턴주 레드몬드]
핸포드 LIGO(중력파 관측소)에서 정석을 만나고 레드몬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차고에서 박스를 뜯어 Seattle Antiques Market에서 배송 온 까마귀 의자를 거실 한가운데로 가져왔다.
불 꺼진 거실, 작은 스탠드 하나가 어둠 속에서 노란 빛을 만들고, 의자는 그 빛에 절반쯤 잠긴 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한 손에 ‘오감도’ 시집을 든 채 서 있는 내 머릿속에 이수의 목소리로 울리는 한 문장.
'유민아, 내가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어. 까마귀 의자에 앉아.'
나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95년 여름의 기억이 어둠 속 물결처럼 떠오른다.
시애틀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이수가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바로 이 의자에 앉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수의 행동은 조금씩… 눈에 띄게 달라졌었다.
그리고 1주일 후,
아무런 이유도,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실종됐다.
나는 의자를 바라보며 망설인다.
앉고 싶다.
정말로 알고 싶다.
이수가 있는 곳을.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온다.
한번 이 의자에 앉으면…
왠지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나는 내 안쪽에서 나 자신이 나에게 건네는 속삭임을 듣는다.
‘…케세라세라… 될 대로 되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주문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 본다.
그래… 나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오늘 하고 싶은 것’보다 ‘내일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공부, 진로, 직업…
모든 판단은 늘 미래에 맞춰져 있었고 현재는 그저 내일을 위한 연료였다.
반면, 이수는 달랐지.
이수는 늘 오늘을 충실히 사는 친구였다.
작은 걸음 하나, 햇빛 한 줌, 음악 한 곡, 그날의 감각을 다 누리려고 애쓰던 친구.
이수가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느끼게 됐다.
나는 그녀의 영향을 은근히, 깊게, 꾸준히 30년 동안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는 걸.
3년 1000일의 만남이, 그 뒤의 27년 10000일에 영향을 주다니…
이수는 내게 이런 말도 했었지.
‘삶은 어떤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그 길을 걷는 과정 자체라고.’
그리고 지금 이수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천천히 의자 앞으로 다가간다.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의자 아래, 아니 의식의 바닥에서 진동이 밀려온다.
눈앞 공간이 미세하게 뒤틀리며 공기가 일렁이며 흐르는 듯하다.
뇌의 깊은 곳이 만취된 느낌. 그 깊은 곳에서 메시지가 부웅 떠오른다, 술 취해 걸을 때, 길바닥이 위로 떠오르는 느낌처럼.
‘YUMIN_002:: SESSION_INITIALIZED...’
짧은 정적.
그리고 의식 전체가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압력이 느껴지며, 나는 어디론가 옮겨진다.
화면이 켜지는 느낌. VR 헤드셋을 쓰고 3D 체험관에 들어갈 때처럼 갑자기 공간이 전환된다.
그리고 어둡고 깊은 공간 안에, 아주 천천히, 한 사람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나는 숨을 삼키며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이수…?”
이수는 여전히 1995년 때 모습이다. 하지만 표정과 눈빛만큼은 다르다.
훨씬 단단하고, 명료하고, 깊다.
마치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혹은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러 온 관객이 처음 온 나를 객석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녀의 목소리가 울린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음성이 아니다.
직접 내 내부로, 내 의식의 중심으로 흘러드는 감각이다.
“유민, 널 기다리고 있었어. 설명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나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어떤 말도 지금 이 상황에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이수야…여긴 어디야?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때 왜 연락이 끊겼던 거야?
아니, 지금 이게…다… 도대체 뭐야?”
이수는 아주 잠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부드럽지만 흔들림 없는 시선.
"나도 차원을 건너기 전에 너에게, 내 가족에게 설명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나 자신도 이걸 온전히 이해 못했어. 완전히 이해 못한 걸 말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고…
미안…”
그녀가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이제.. 한번에 전부 공유할께. 유민아, 의식을 나에게 집중해봐”
나는 숨을 들이쉬고 그녀의 실루엣, 그 눈빛, 그 존재 전체에 집중한다.
그러자, 내 의식의 경계가 이수의 의식 경계와 맞닿는다.
처음엔 얇은 막이 서로를 스치듯 닿더니 이내, 물과 물이 섞이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겹쳐 들기 시작하다… 이수의 의식이 내 안에 스며든다.
단어도, 문장도 아니다. 개념 자체가 공유 되는 느낌이다.
마치 두 프로그램이 ‘공유 메모리(shared memory)’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처럼, 생각과 기억과 감각이 선형이 아니라 동시에 공유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2025년 레드몬드에 있지 않다.
어느새 1995년 8월,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이수와 이상이 마주했던 그 시공간 속에 떠 있다.
내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 안에 직접 들어온 것이다.
이수의 눈을 통해, 이수의 감각을 통해, 이수가 느낀 두려움과 혼란과 알아감을 그대로 같이 느끼며
나는 이수와 이상 사이의 대화 한복판에 껴 있다.
[유민 : 이수와 이상, 1995년 8월, 인사동]
공간 아닌 공간에서 이상의 목소리가 들린다.
공기를 거치지 않은, 순수한 의미로만 이루어진 목소리 같다.
[이상]
"너희 세계는 우리 세계의 양자 컴퓨터에서 실행 중인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밝혀낸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과 우주 상수를 반영하여, 초기 우주 생성부터 현재를 지나 우리 세계의 미래를 시뮬레이션 하는 프로그램이지"
이수의 불신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이수]
“못 믿겠어요... 당신은 이 세계의 신인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피조물인 제가 당신 말을 알아듣는거죠?”
이상에게서 웃음인지 연민인지 모를 파형이 스친다.
[이상]
“나는 신이 아니다.
그저 우리 우주의 물리 법칙을 반영해 너희 세계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설계자이자 관리자다. 신보다는 시계공에 더 가깝지.
너에게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를 너희 세계의 언어와 기호 체계에 해당하는 ‘신호’로 변환해 너에게 직접 전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정보의 흐름이 멈추듯 고요가 흐르고, 이어 설명이 더 깊어진다.
“예를 들어 너희 세계에서 무게 단위는 kg, 길이를 1m 라는 단위를 쓰지 않느냐? 그건 너희끼리 약속일 뿐이다. 1m를 파리 박물관에 있는 백금 막대기 길이로 너희가 약속했든, 너의 세계에서 빛이 1초에 이동하는 거리의 1/299,792,458 정의해서 사용하든 간에, 내가 셋팅한 너희 세계의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하다. 내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 사용한 상수 중 하나니까.
내가 만든 너희 세계 시뮬레이션 세계가 지형이라면, 너희가 정의하여 사용하는 단위는 그 지형을 이해하려고 만든 지도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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