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와 해독자

이수, 1995년 8월, 서울 합정동/인사동

by Funny Sunny

[이수, 1995년 8월, 서울 합정동/인사동]

인사동에 다녀온 이후, 나는 내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계가 달라 보인다고 할까?

이상에게서 ‘세계의 기원과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후, 나는 예전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


예전엔 ‘무엇이 중요한가’를 고민하며 작은 것에도 의미를 찾으려 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모호해져 버렸다.

이전엔 소중하다고 믿었던 것들,
오늘의 일상, 꿈, 계획, 인간관계, 미래…
이제는 다 부질없는 장식처럼 보인다.

나는 매일 조금씩 더 무기력해져 갔다.

오히려…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국문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때 복호화된 시제4호 수열로 전화 키패드를 누르지 않았다면...

그때 수화기 너머 목소리를 무시했더라면…
그때 그 까마귀를 따라 골동품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 이 세계는, 아직도 예전과 같은 얼굴로 나를 대해 줄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합정동 집 내 방.
창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여름 열기와 거리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하지만 지금 내 귀 안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내 목소리,
아니 내가 아닌 어떤 목소리가 뒤섞여 메아리치고 있다.

그날,
이상을 머릿속에서 만난 이후 수많은 소리가 겹겹이 맴돌다가 이제는 단 한 문장만, 고장 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끝없이 반복된다.

‘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
아니… 더 존속하게 하고 싶어…
아니… 나도 소멸되고 싶지 않아…’

거리 소음이라도 줄이려고 방 창문을 닫아 보지만,

거리 소음이 줄어든 것보다 더 요란하게 이 문장들이 두개골 안쪽을 긁으며 돌아다닌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Funny Sunn···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호접춘몽피크닉(好蝶春夢Picnic) = 호접몽+일장춘몽+인생은 피크닉. 일상을 기록합니다.

8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4화우연이 두 번 ‘이상’이면 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