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2025년 8월, 워싱턴주 핸포드 LIGO (중력파 관측소)
[유민, 2025년 8월, 미국 워싱턴주 레드몬드]
CERN에서 고에너지 입자와 충돌 사고를 겪은 지도 어느덧 4개월이 지나간다.
지난주, 시애틀 워터프론트 공원 근처 Seattle Antiques Market에서 까마귀 의자를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분명 1995년 여름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이수가 앉았던 그 의자였다.
특히 의자 등받이에 새겨진 삼태극 문양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의자를 다시 본 그날 저녁 레드몬드 집에 돌아온 후, 지난 4월 제네바 대학 병원에서 정석이 내게 한 말도 떠올랐었다.
“유민, 몸은 좀 어때? 나 교환 연구원 임기가 이달 말 끝나서 핸포드 LIGO(중력파 관측소)로 돌아간다. 너 몸 좀 괜찮아지면... 무엇이든 상의할 것이 있으면 잠깐이라도 핸포드로 한번 와”
1996년 가을, 대학 졸업 여건이 갖춰지자마자, M사 한국 지사 근무에서 시애틀 본사로 근무지를 옮긴 건... 내 경력에 너무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이수가 실종된 서울에서는 수많은 장소에서 함께 했던 이수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자꾸 떠오르는 게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수가 실종된 도시.
지나가는 종로 거리, 버스 창가, 심지어 비 오는 골목 냄새, 그 모두가 이수와 함께 했던 기억의 그림자로 나타났다. 그래서 떠나왔는데…
30년간 애써 잊고 봉인했다고 생각했던 이수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CERN에서 고에너지 입자와 충돌 사고 직후 환청처럼 들은 이수의 목소리로, 봉인 해제된 듯하다.
마치 잠가놓은 추억 상자의 자물쇠에 금이 간 것처럼...
더욱이, 지난주 1995년 이수가 인사동에서 앉았던 의자를 다시 봤을 땐, 마치 호수 밑바닥에 30년간 조용히 침잠해 있던 모든 부유물이 호수에 떨어진 바위에 놀라 한꺼번에 수면 위에 떠오르듯, 내 마음을 흔들어놨다.
제네바 병원에서 이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새겨지는 것 같던 경험은, 사고에 따른 일시적 후유증이라 생각했고, 그 또한 바로 잊으려 애썼는데...
하지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의자는 - 내 기억과 감정을 다시 흔들어 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 그 실체적 질량감이 컸다.
지난주부터 회사는 나가지 않고 있다. 본부원들에게는 재택근무라 둘러댔지만, 실제로 집에서 하루 종일 한 건, 96년 미국 올 때 갖고 온 짐 중, 차고 한편에 쌓아 놓고 30년간 뜯지 않고 있던 상자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는 거였다.
봉인해 놓았던 이수와의 기억과 감정을 다시 마주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이수에 대한 모든 추억들이 30년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생생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한 박스에서 나온 '이상 전집',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이 책은… 낯설다. 내가 샀던 것인가? 아니면 이수가 맡겨 두었던 걸까?
연이어 떠오르는 지난 일들.
1995년 7월 이수와 Mac & Jack 맥주를 마시며 나눴던 오감도 시제4호에 대한 난상 토론, 이수의 실종 후 마음에 짚이는 장소들을 정신 없이 돌아다니며 사라진 이수를 찾던 그해 여름, 그때 인사동 골동품 가게도 몇 차례나 들렸었지... 그 가게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난 이수는 꽤 이상했었으니까. 그 의자가 지금 내게 배송되어 오고 있다...
이 기억들 때문일까? 이상 전집을 들고 서재로 온 나는 그 뒤로 이틀간 이상 전집을 정독했다. 그리고 발견한 이상 전집에 수록된 시 ‘진단 0:1’.
‘진단 0:1’을 읽고 난 뒤, 무언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등줄기가 꽤나 서늘하다.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답장이 어느 순간 손바닥 위에 떨어진 듯한 느낌.
난 빨리 정석을 만나고 싶어졌다.
결국 다음날, 난 회사에 꽤 긴 병가를 냈다.
정석이 있는 핸포드 LIGO(중력파 관측소)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머릿속은 온통 며칠째 이어지는 상념들로 가득하다.
시애틀 워터프론트의 촉촉한 바람과는 달리 차창 밖으로 스치는 공기는 메마르고 얇았다. 워싱턴주 내륙 사막 지대 특유의 건조한 바람 속에서 풍경은 선명한 만큼… 어째서인지 현실감은 더 옅어 보인다.
레드몬드에서 정석이 있는 핸포드까지는 3시간 남짓 걸렸다.
[유민, 2025년 8월, 미국 워싱턴주 핸포드 LIGO(중력파 관측소)]
"정석아, 이거 좀 봐. 이상의 시집에 수록된 ‘진단 0:1’이라는 시야."
관측소 입구에서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던 정석은, 사무실 한편 휴게실에 앉자마자 갑자기 책을 펴 들이미는 나를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쳐다본다. 이런 정석을 애써 무시하며, 난 조급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나는 책을 스캔해 프린트한 이상 시의 ‘진단 0:1’과 ‘오감도 시제4호’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펼치며,
“정석아, 이 두 개… 그냥 시가 아니야.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이상해.”
정석은 프린트된 종이를 자기 앞으로 당겨 잠시 보더니,
“봤어. …근데, 그래서?”
나는 숨을 고르며 두 시를 다시 테이블 중앙으로 옮겨놓는데, 목소리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정석아, 이 두 페이지… 반으로 접으면 정확히 겹치는 거 보여?
숫자 배열이 그대로 중첩돼. 이건 우연이 아니라, 의도야.”
정석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나는 더 조급하게 말을 잇는다.
“힌트는 더 있어.
여기, ‘이상 책임의사 이상.’ 이름을 앞뒤로 썼잖아…
이거, 한글로 만든 *palindrome 같지 않아?
마치 종이를 반으로 접어보라는 힌트처럼,
‘여기를 접어라’ 하고 달아놓은, 오래된 똑딱이 단추같지 않아?”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쉰다.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이 다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뒤틀리는 느낌이 든다.
“1995년 때 내 지식으로는 '오감도 시제4호'를 그냥 0과 1, bit까지 상상하며 복호화했었는데, 30년 지나 '진단 0:1'시와 함께 다시 보니, 이상은 0,1 bit를 얘기하려고 한 게 아닌 것 같아... 0과 1이… 단순히 둘 중 하나가 되는 상태가 아니라,
0과 1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상태. 즉, *Qubit 개념을 시를 통해 우리에게 힌트 주려고 한 것 같아. 그러니 인간 언어로 시를 해석할 수 없는 시가 만들어진 거지. 마치 아주 아주 작은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자연어로 설명도 이해도 힘든 것처럼 말이야. 컴퓨터공학 입장에서 보면 마치 프로그래머가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에 *이스터 에그를 심어 놓듯, 이상은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힌트를, 자기 시에 이스터에그로 심었단 생각이 들어.”
조급히 말하고 나니, 내 목소리 끝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
“근데 왜? 아니 1930년대에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지? 나 혼란스러워서 네게 온 거야. 정석아, 물리학자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
숨도 쉬지 않고 쏟아내는 내 말을 정석은 마치 젖은 스펀지처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괜히 마음속 한켠에서,
‘그래, 네 맘 내가 다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이렇게 쏟아내는 거다’
하는 이상한 연대감이 잠깐 일었다.
하지만 정석은 그 연대감 따위 바로 잘라내듯 말한다.
“잠깐만.
너 지금… *리처드 파인만이 양자 시스템 개념을 처음 제안하기도 전에, 시인 이상이 50년이나 앞서서 양자 컴퓨팅 개념을 시에 썼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너도 알고 있지?”
그의 어조가 살짝 올라갔다.
“오감도가 1934년 발표라고 했지?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슈뢰딩거가 양자역학 해석 문제로 피터지게 싸운 게 1935년이다.
그 난리가 끝이 안 나니까, 슈뢰딩거가 고양이 사고실험을 편지에 적어서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게 1935년 8월 쯤이고.”
정석은 이마를 짚으며,
“유민…
너 지금 너무 멀리 가고 있다.
CERN 사고 난 뒤에 이수 목소리도 들렸다 했지?
너… 진짜 괜찮은 거냐?”
나는 그의 걱정 섞인 말에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석아, 나도 알아.
1995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으론 오감도 시제4호를 bit 구조안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나는 1995년 여름, 이수와 시애틀 워터프론트 근처 Seattle Antiques Market에서 오감도 시제4호가 실린 신문을 발견했던 일부터, 비트 연산으로 암호를 풀어보려던 그날 밤, 젖은 냅킨 위에서 XOR을 끄적이던 순간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정석에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빠짐없이 전한다.
"1995년도 내 지식과 논리로 추론하며 찾아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어.
근데 지난주 이상 시집에서 '진단 0:1'을 본 후, 오감도 시제4호와 연결해 생각해 보니, 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지난 30년 나도 많이 바뀌기도 했고..."
정석이 묵묵히 듣자, 나는 천천히 두 시가 프린트된 종이를, 숫자들이 다시 중첩되도록, 맞붙이며 말을 잇는다.
“정석아… 나는 이상 시인이 이 세계의 ‘가장 바닥 구조’가 bit 같은 고정된 이진법 구조가 아니라, Qubit 즉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라는 걸… 시적 비유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어.
그는… 양자역학과 양자 컴퓨팅의 근본 원리를 그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정석의 굳은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스스로도 멈출 수 없는 속도로 말을 이어간다.
“물론 이런 연결은… 은유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이야. 나도 그건 알아.
하지만 말이야… 만약 이상이 정말로 양자 컴퓨팅의 근간인 Qubit개념을 시의 형태로 숨겨놨다면?”
정석은 천천히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음… 이 정도면 일반인 치곤 아주… 잘 미쳤어.”
이어 입꼬리를 살짝 비틀고 씁쓸하게 웃는다.
“물리학 학회 끝나고 물리학자들끼리 맥주집에 모여 ‘본 회의에서는 말 못 하는 카더라 이론’ 난상토론 벌일 때… 딱 이런 느낌이거든.
그리고 나도 세상의 이치를 구하는 물리학자로써, 엉뚱한 얘기 자체는 싫지 않아.
하지만… 유민, 너 지금 시 해석이 너무 멀리 날아갔어. 비약이… 너무 심해.”
잠시 침묵이 정석과 나 사이를 감싼다.
"정석아, 우리가 처음 고등학교에서 만났을 때가 18살쯤이었는데, 어느덧 50살이네. 난 컴퓨터 전공으로, 넌 물리 전공으로 같은 대학 들어가고…"
정석은 픽 웃으며 나를 흘겨본다.
"뭐야, 갑자기 신파로 빠지냐? 내가 너무 타박준거야?"
“아니… 그냥 생각나서.
대학교 2학년 때였나?
해도 덜 진 오후였지.
도서관에서 갑자기 나를 찾더니, ‘야, 막걸리 먹자’ 하고 끌고 나가던 날…”
정석의 표정이 살짝 풀리는 걸 보고 난 이어 말한다.
“난 그때 너에게서 ‘미시 물리’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그땐 양자 물리란 말도 안 쓰고 미시 물리라고 불렀었잖아… 아마 그날 너는 미시 물리 수업을 듣고 온 날이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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