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코드

이수, 1995년 8월, 서울 서대문구

by Funny Sunny

[이수, 1995년 8월, 서울 서대문구]

창밖에는 한여름 햇살이 학교 건물 앞 아스팔트 주차장을 뜨겁게 누르고 있다.
주차장 바닥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오는 열기는, 연구실 창문을 통해서도 내 손끝에 닿을 것만 같다.

‘그래도 내가 있는 연구실은 냉방이라도 잘 돼서 다행이야…’

지난주, 유민을 따라다녀왔던 섭씨 20도 안팎의 시애틀이, 지금 생각하면 꿈처럼 멀다.

시애틀의 맑고 서늘한 초여름 공기를 기억한 채 후끈 달아오른 서울 8월의 무더위를 마주하고 있으니, 왠지 지난주 여행의 잔상이 일거리 더미 위로 잔잔히 번져온다.

책상 위 펼쳐진 인쇄물에 보이는 이상 시인의 ‘오감도 시제4호’.

국문과 교수님과 함께하는 ‘근현대시 재해석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받은 자료다.
흰 종이 위에 검은 숫자들과 짧은 문장이 배열된 참 삭막한 느낌의 시다.

나는 시의 숫자들을 펜으로 따라 써보며 생각한다.

‘반복. 주기. 대칭… 이게 시가 맞나...?’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 때 국문과 김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상의 시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내재된 다른 메시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동안 인문학적 관점으로 수십 번 해석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러운 결론에 한 번도 닿지 못했다고도 하셨다.

그래서 결국, 데이터 마이닝 전공인 내 지도교수님에게 찾아와 ‘다른 관점에서의 수리적 해석 가능성’을 타진하신 거겠지...

‘하지만, 잘… 모르겠다.’
종이 위의 숫자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나는 펜끝을 굴리던 장난을 멈추고 천천히 창문을 연다.

순간, 후덥지근한 바람이 한꺼번에 연구실 안으로 밀려든다.
다시금 시원한 바닷바람의 지난주 기억이 그리워질 때 함께 생각난 친구, ‘유민…’

시애틀에서 내게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 모습,
기계어, 비트, XOR이니 하며 한참을 떠들던 그의 웃으며 진지했던 얼굴.

그때는, ‘또 난수 테이블이나 만드는 거냐’며 내가 투덜댔지만,

사실 속으로 꽤 놀라고 있었다.

복호화? XOR? 키값? 평문? 암호문?

국문학 협업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런 단어를 접할 줄은 예상 못했었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며, 숫자들이 하나의 규칙처럼, 작은 숨결처럼 움직이던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과 묘한 흥분이 동시에 스쳤었지…

‘근현대시 재해석 프로젝트’라는 틀 안에서 보면, 봄학기 내내 내가 쏟아부은 시간에 비해 정작 시애틀에서 유민과 보낸 그 하루가 더 많은 진전을 만든 셈이다.

‘봄학기 내내 나는 이런 저런 데이터 마이닝 기법을 적용해 보겠다며 수십 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국엔 늘 같은 자리만 맴돌았었는데…’

숫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찾으려는 패턴은 잡힐 듯 말 듯 어둠 속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런데 유민은… 그 짧은 시간, 노트북으로 옮긴 시제4호의 숫자들을 뚫어져라 보더니… 추론, 논리, 컴퓨터 지식을 활용해, 자기 나름데로 결론처럼 보이는 곳까지 나아가 버렸다.

물론 그때 나는 겉으로는 ‘쳇, 부담 없이 막 지른 거니까. 뭐…’ 하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지만…

솔직히, 서울 돌아온 후 틈만 나면 유민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기묘하게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시애틀 펍에서 챙겨온 냅킨에 쓴 메모를 가방에서 꺼내 다시 펼쳐 보곤 했다.

맥주 얼룩이 스며든 종이 위에 삐뚤빼뚤 적힌 유민의 메모들.

이진수 변환식, XOR 표식, 평문–키–암호문 관계까지…

그 낯선 단어들의 조합이 숫자 옆에서 이상하게 생기를 띤다.

나는 그 냅킨 메모들을 하나하나 PC 파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정리 차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옮겨 적다 보니 손끝이 미묘하게 떨린다.

‘도대체 유민의 머릿속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나는 몇 달을 씨름해도 못 본 걸, 어떻게 그 애는 몇 시간 만에 자기만의 결론을 잡아버릴 수 있지?’

암호화복호화 한번 더 정리.png

근데…이 숫자들이, 도대체 뭐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시인지, 코드인지, 난수표인지, 아니면 그냥 인쇄 오류인지…
점점 구분이 흐려진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더 생각을 굴려보려 하지만 결국 결론은 늘 같았다.

딱 유민이 도달한 곳 까지다.
그 너머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더 이상 의미 있는 진전을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잠시 한숨을 뱉고 책상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긴다.

“…젠장.”

그래도 내 연구는 멈추지 않는다.
이게 내 일이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상, 최소한 교수님께 빈 손을 내밀 순 없으니까.

어쨌든, 다음 단계로 가보자.

연구실에서 주로 쓰는 통계 분석 프로그램, SAS.
이 난수 같은 숫자 배열을 입력하기 위해, 먼저 테이블로 표현된 숫자들을 직렬화(serialize) 해본다. 빈칸은 제거하고, 각 행의 값을 순서대로 쭉 이어 붙이는 방식.

나는 숫자 테이블을 바라보다 PC 모니터를 켜고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마치…의미 없는 잡음처럼 들리는 숫자들을 줄을 지어 한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느낌이다.

6, 9, 9, 7, 6, 4, 13, 0, 3, 1, 2, 9, 9, 7, 6, 4, 13, 0, 3, 1, 2, 15, 9, 7, 6, 4, 13, 0, 3, 1, 2, 15, 8, 7, 6, 4, 13, 0, 3, 1, 2, 15, 8, 6, 6, 4, 13, 0, 3, 1, 2, 15, 8, 6, 6, 5, 13, 0, 3, 1, 2, 15, 8, 6, 6, 5, 5, 0, 3, 1, 2, 15, 8, 6, 6, 5, 5, 10, 3, 1, 2, 15, 8, 6, 6, 5, 5, 10, 1, 1, 2, 15, 8, 6, 6, 5, 5, 10, 1, 0


역시… 그냥 난수일 뿐이다.
어떤 규칙도, 어떤 숨은 패턴도 보이지 않는다.

‘일단 SAS에 넣어서 이것저것 돌려보자. 뭐라도 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숫자열을 정리하던 중, 연구실 한쪽에서 익숙한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란이 들린다.

“야, 점심 뭐 먹지?”
“짜장면? 짜장면 가자.”
“아니면 짬뽕? 탕수육은 큰거로?”
짧은 집단 토론 같은 대화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연구실에서 하루 중 가장 진지한 토론이 바로 이 점심 메뉴 결정 토론이라고 하면,
아마 연구원 그 누구도 부정 못할 것이다.

그리고 통상 정해지는 메뉴는… 짜장면, 짬뽕, 탕수육...
학부 연구생인 나는 늘 그렇듯 결국 그 주문을 넣는 역할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 반복되는 ‘토론 → 결론 → 주문’ 이 3단계의 완벽한 루틴을 보고 있노라면, 교양 물리 시간에 들었던 ‘결정론적 우주론’이 문득 떠오른다.

‘결국 오늘 내가 시키게 될 메뉴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지.’

점심 주문을 마치고, 배달이 도착할 때까지 찾아오는 그 짧은 멍의 시간.

나는 책상 한쪽에 밀어둔 ‘직렬화된 난수열’을 다시 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전화기 키패드에 숫자를 하나씩 눌러본다.

6, 9, 9, 7, 6, 4, 1, 3, 0…

버튼을 누를 때마다 ‘삐~’ 하는 짧은 전화음이 울린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음색이다.
심지어 숫자를 누르는 리듬에 따라 어떤 멜로디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전화음에 맞춰 박자도 조금씩 달리해본다.

삐~ 삐삐~ 삐~

별 의미 없는 장난인데 희한하게 손끝이 멈추지 않는다.

‘점심 짜장면 언제 오나…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멍 때리며 직렬화된 숫자열의 마지막 숫자를 누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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