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1995년 & 2025년

유민, 2025년 7월, 시애틀 / 유민, 1995년 7월, 시애틀

by Funny Sunny

[유민, 2025년 7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바닷바람이 분다.

waterfront.png

시애틀 항만 워터프론트 공원. 잔잔한 물결이 부두 끝을 어루만지고, 대관람차는 천천히 회전한다. 해는 높고 바닷바람은 살결을 스치며 기분 좋은 시원함을 남긴다. 나비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밭 위를 날고 있다. 마치 ‘질량’이 없는 것처럼.

제네바 사고 직후 한 달 간의 현지 병원 치료를 마친 뒤 시애틀로 돌아온지도 두 달이 넘어간다. 시애틀 워싱턴 주립대 병원에서 재검사 결과 뇌 전두엽에 미세한 점이 보이고 그 뒤로 가늘고 긴 바늘 같은 상흔이 생겼으나, 신체 활동과 정신 활동 검사에서 특이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간헐적인 두통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때마다 현기증에 눈을 감으면 머릿속 어딘가에서, 명확하지 않은 단어들이 마치 윈도우 명령창의 흰색 프롬프트처럼 점멸하곤 한다.

처음엔 단순한 사고 후유증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점 반복 주기는 짧아지고 있다.

어느 날부턴가, 단어들이 태그처럼 의식 표면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엿보이는 이름 하나.

‘이수’


순간, 머릿속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며 또 다시 단어들이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부웅 떠오른다. 눈으로 보는 감각이 아니다. 마치 전기 신호로 직조한 텍스트를 뇌 속 내부 모니터에 바로 출력하면 이런 느낌일까?

'차원, 세계... 까마귀? 그리고 이수, 왜 이런 단어들이 느껴지지?’


단어들이 사라지자마자, 현기증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그 파도를 따라 바람이 스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바람인지, 아니면 흔들리는 의식이 만들어낸 잔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 헷갈림을 털어내듯 눈을 뜬 순간, 까마귀 한 마리가 내 옆을 스치며 날아간다.

검은 깃털이 남긴 잔상이 내 기억 어딘가에 아주 미세한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은 삽시간에 벌어져 나를 1995년 여름, 시애틀, 이수와 함께 걷고 뛰던 그 순간 속으로 밀어 넣는다.


1995년 7월,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드는 M사와 최종 면접을 보기 위해, 시애틀 본사를 방문 중이었다. 당시 M사는 텍스트 기반 컴퓨터 운영체제가 대부분이던 컴퓨터 시장에, 그래픽 기반 운영체제를 미국에 8월 출시한 뒤, 같은 해 12월까지 한국 시장에 출시를 원하고 있어 새 운영체제 한글 버전을 유지 보수할 팀을 서둘러 조직하고 있었다. 당시 M사 대표도 대학 중퇴 후 회사를 세운 인물이었던 덕에 실무 능력을 중시해, 학생 신분인 나에게도 뜻밖의 기회가 열렸었다.

하지만 큰 기회만큼 부담도 컸기에, 나는 내 베스트 프렌드이자 여자친구인 이수를 조르고 졸라 함께 시애틀에 왔다.

대학 입학 직후 만나 금방 술친구가 되었고, 언제부턴가 서로의 안식처 같은 존재가 된 이수와 함께라면, 3일 동안 이어지는 M사의 다면 면접도 조금은 덜 긴장하고 잘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도 시애틀 퓨젯사운드 앞 워터프론트 공원에는 지금처럼 시원한 바다 바람이 불었었지...


[유민, 그리고 이수, 1995년 7월, 시애틀]

“시애틀 바다 바람 진짜 좋다!!”
이수가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으며,
“재작년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단성사에서 같이 봤을 때는 그냥 영화 속 이야기였는데… 우리가 진짜 시애틀에 올 줄은 그 때 누가 알았겠어?”

바다 냄새와 함께 이수 특유의 미소 띈 웃음이 터져나온다.

“어제 인천에서 출발할 땐 한국이 일요일이었는데, 11시간 비행해서 도착했더니 여기도 일요일이더라? 하루를 번 것 같아서 완전 신나지 않아?
나 지금 타임슬립 한 기분이야~!”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잠시 고민한다.

‘무거운 물체 주변에 시간 지연 효과가 발생하는데, 기내식 너무 많이 먹고 너 갑자기 살찐 거 아냐? 블랙홀 수준으로?’

난 목 끝까지 올라온 위험한 농담을 간신히 눌러내리며,

“시차 때문에 그렇지 모.”

짧게 대답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농담 했으면, 또 또 아재 개그한다고 핀잔 먹었을 거야.. 잘 참았어..’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며 바닷바람을 깊게 들이마신다.


이때,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활강하는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가볍다.
깃털이 공기 중에 떠 있는 나비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질량이 없는 생명체 같다.

시애틀에 온 후 묘하게 자주 눈에 띄던 까마귀다.

“저 까마귀… 아까부터 보지 않았어?”
이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몸집이 유난히 커. 미국은 까마귀도 사이즈가 다른가 봐.
따라가볼까?”

“날 수 있다면… 쿨럭…”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옆구리에 찌릿한 통증이 올라와 숨이 잠시 멎는다.

그렇다고 내 옆구리에 팔꿈치를 꽂아 넣은 이수를 쳐다볼 순 없다.


우리는 말없이 워터프론트 길을 따라 걷는다.
고가도로 아래로 들어오자 햇빛이 차단되며 공기가 서늘해진다.
회색 벽돌 건물들이 늘어선 사이로 시애틀 특유의 도시 분위기가 번져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전면에 걸린 빛에 바랜 크림슨색 간판이 눈길을 끈다.

‘SEATTLE ANTIQUES MARKET.’

“저기… 가볼까?”
방금 전 옆구리 통증을 털어낸 뒤, 내가 조심스레 꺼낸 첫마디다.

seattleantiquemarket.png

가게 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종이 ‘댕~’ 하고 가게 안에 울린다.
어둑한 조명 아래, 빈티지 가구와 낡은 현악기, 세월이 눌러놓은 잡지와 책들이 층층이 쌓여 작은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seattleantiquemarket2.png

먼지 냄새와 오래된 나무의 향이 뒤섞인 사이를 지나가던 이수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 서며,

“유민! 이거 봐!!”

뭘 보라는 건지 감이 오지 않지만 바로 “뭘?” 하고 되묻는다면 내 옆구리가 위험하다. 최대한 상황을 파악하려고 이리 저리 시선을 돌리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응? 뭐?”
옆구리에 양 팔을 붙이며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장착하고 물어본다.

일단 상황 파악이 먼저다.

이수가 다시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여러 잡동사니가 올려져 있는 그저 그런 오래되어 보이는 책상이다.

“음, 동양적인걸? 한국 건가? 오래돼 보이네.”

내가 책상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수가 답답하다는 듯 더 깊게 손가락을 뻗으며,

“아니 아니, 책상 말고 이 신문. 이거 말이야. “

책상 위에는 헌 신문더미가 보이는데, 이수가 가리킨 건 그중 가장 위에 놓인 한 장이었다.

오감도.png

한자가 많아 한눈에 의미가 들어오진 않는다.
하지만 신문 위 본문의 독특한 숫자 배열을 보는 순간, 고등학교 문학 수업에서 본 내용이 번개처럼 스친다.

‘이상 시인의 오감도?

기억을 확인해주듯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한자 제목 오감도(烏瞰圖).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한번은 짚고 넘어가는 그 시다. 그걸 여기 시애틀에서 보네...

“아니 이게… 왜 여기 있어?”


이수는 조심스레 신문더미 맨 위 첫 장을 빼낸다.

세월로 흐릿해진 신문 상단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 중앙일보> 1934.7.28‘


“이거 김 교수님 갖다 드리면 엄청 좋아하시겠는걸?”

“김 교수님…?”
무심코 되묻는 내 말에 이수가 눈을 크게 뜬다.

“나 금년 봄 학기부터 김 교수님 프로젝트 같이 하고 있다니까.
너가 처음 시애틀 같이 가자고 했을 때도, 이것 때문에 나 바쁘다고 했었는데…? 기억 안 나?”

"아... 그랬지..." 일단 시간을 벌고 본다.

이수는 기다렸다는 듯 신문을 살짝 흔들며 말을 잇는다.

“내가 말했던 그 프로젝트.
이상 시집 전체를 데이터화해서 수리적 패턴을 찾는 연구.
언어학 말고 데이터 마이닝으로 시를 분석해보는 거야.
‘오감도’가 자연어로는 도저히 문맥이 안 잡히는 부분이 많거든.”

이수의 눈빛이 조금 더 반짝인다.

“특히 ‘오감도 시제4호’는 아예 숫자로 쓰인 시잖아.
지금 이 신문에 있는 바로 이 시. 프로젝트에서 내가 맡은 시이기도 해.
국문과에서 수와 상징이 많은 이상 시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많으니까 우리 통계학과 교수님에게 협업 요청이 들어온 거지. 어찌 보면… 국문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시를 숫자와 데이터로 분석해 보겠다니...”

잠시 웃다가, 이수는 다시 신문을 들여다본다.

“과 교수님이 연구원 제안 주셨을 때… 나도 속으로 좀 당황했지.
그래도 대학원 지도 교수님으로 생각하고 있던 분이시고 알바 급여도 꽤 괜찮아서 바로 수락했지만…
막상 자세한 프로젝트 설명을 들으니까 머리가 더 지끈해졌었어.
그래서 그날 너한테 술 마시자고 한 거잖아.”

그제야 나는 기억이 되살아난다.
봄날 어느 저녁, 이수가 뜬금없이 술 마시고 싶다며 연락해왔던 그날이.

난 그냥 이수랑 같이 술 마시는 게 좋아서, 그때는 얘기에 그리 집중하지 않았었는데… 이상 시인 이야기가 나왔던 건 기억이 난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Funny Sunn···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호접춘몽피크닉(好蝶春夢Picnic) = 호접몽+일장춘몽+인생은 피크닉. 일상을 기록합니다.

8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1화프롤로그 – 충돌